"엄마, 엄마는 훌륭한 권투선수같아."
"응? 갑자기 왠 권투? 엄마 운동 잘 못하는거 너 알잖아."
"내가 엄마의 '감정의 샌드백'이잖아. 어퍼컷, 라이트 훅훅... 장난아니야. 기냥 세계 챔피언이야."
"... .... ...."
"오늘은 엄마가 너한테 KO패 당했다. YOU WIN!"
요 몇칠, 도무지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된다. 불쑥불쑥 미칠듯이 화가 나고, '마음속의 화'라는 성냥개비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없이 타들어가서 나를 집어 삼키고, 그 불길로 주위 사람들까지 다 태워버리고 만다. 인간의 마음이라는게 간신히 가라앉힌 흙탕물 같아서, 발로 한번 툭 치기만해도 가라앉았던 부유물이 순식간에 훅 올라와 다시 물이 뿌옇게 탁해진다.
부끄럽지만, 그럴때마다 나의 감정의 먹이사슬의 최하단에 위치한 아이에게 그 구정물을 끼얹어 버리고 만다. 말하는 순간 후회하면서도, 머리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기어이 끝을 보고 마는건, 실은 아이가 미워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미워서이다. 성인이 되어서 나는 엄마의 '감정의 쓰레기통'이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는데, 내 아이의 입에서 비슷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 말이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서 많이 울었다. 사춘기 아이가 나에게 던지는 뾰족하고 날선 말들을 얼마든지 내 품의 방패로 받아내어 무디게 만들 수도 있건만, 에미라는 작자인 나는 그 날선 말들을 더욱 뾰족하게 다듬어 독침까지 달고 아이에게 되돌려주기도 한다.
눈치가 빤한 녀석이, 제가 한 잘못을 엄마가 묵혀둔 감정 폭발의 도화선으로 삼는다는 것을 모를리 없다. 잘못한 건 명백하긴 하지만, 엄마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일단은 안들리는 척 하거나, 눈을 게슴츠레 뜨고 영혼없이 눼눼 한다. 그럼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서 또 화를 내고 마는. 악순환이다.
어른이 되면, 내 감정쯤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마땅히 저절로 그리 되는 줄 알았다. 내일 모레 지천명이라는 오십이 가까워가는 이 나이에도 나는 참 미숙하기 그지없다. 좋은 엄마는 되고 싶고, 내 안에는 아직 미숙한 어린애가 여전히 살고 있고. 그 괴리감에 나는 자주 균형을 잃고 휘청거린다. 일기장에 털어놓는 부끄러운 고백.
사랑하는 장중딩아. 네가 엄마의 샌드백이라고 느끼게 해서 정말 미안해. 너는 엄마의 '감정의 sandbag'이 아니라 '감정의 blanket'이야. 네가 포근하게 덮어줘서 차갑게 얼어붙은 엄마의 감정이 그나마 금방 녹곤 한단다. 어른답지 못하게 굴어서 부끄럽고 미안하다. 손들고 반성중이야.
근데, 너 엄마 알잖아... 그니까 쫌, 눈치껏 작작해주렴...
잘자라고 있어서 감사해.
사랑한다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