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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모르는 개

<어쩌다 개 3부작>

by 한아

그렇게 순진무구한 두리 애기씨는 생전 첨 보는 남자..아니 남견에게 내 아~를 낳아도..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누가 알려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남자 손... 아니 발 한번 잡아본 적 없던 숫처녀 두리 애기씨는 윌리엄 에드워드 세바스티안처럼 생긴 귀티나고 늠름한 순종 멍멍이와의 단 몇 시간의 합방 후에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강아지 때부터 옆에 끼고 살던 두리가 배가 불룩해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좀 낯설었다. 어린 동생 먼저 시집보낸 언니의 마음 같았다고 하면 오버도 오지다고 비웃음을 사려나...


점점 움직임이 둔해진다 싶던 어느 날, 두리는 가쁜 숨을 쌕쌕 몰아쉬며 비척비척 집으로 들어가 모로 눕더니 낑낑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새끼를 낳으려고 하는 것 같다."

엄마는 산바라지 하는 노파처럼 깨끗한 수건을 여러 장 깔고, 따뜻한 물도 한대야 떠놓고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 작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힘을 주었다가 숨을 참듯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바들거리며 한 마리 한 마리 떨굴 때마다 나와 엄마는 한마음이 되어 국가대표 선수를 응원하듯,

"옳지, 옳지, 힘내... 힘내.. 잘한다."

소리를 지르며 조마조마한 맘으로 두리를 지켜봤다.


혀를 길게 빼물고 가쁜 숨을 쌕쌕거리며 네 번째 강아지가 나왔을 때 비로소 두리의 끙끙 소리가 잦아들었다. 완두콩 꼬투리보다 조금 클까 말까 한 고 조그만 뱃속에 조로록 네 마리나 들어있었다니, 생명의 신비는 참 경이로웠다. 엄마는 헷갈리지 않도록 나온 순서대로 빨강, 파랑, 노랑 색색의 실을 강아지 다리에 묶어주었다.


내가 한아(하나), 어미가 둘(두리)이므로 이어서 셋, 넷, 다섯, 여섯...

그리하여 나온 순서대로 세리, 그다음이 네리, 그다음은 다리, 막내는 유리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당시 연못 속의 맨발 투혼으로 온 국민을 감동시키며, '헤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를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게 했던 국민 영웅, 필드의 요술공주 '쎄리 팍' 선수에게는 차마 죄송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귀여운 애기 이름을 '삼리'라고 짓기는 좀 그래서 세리는 그냥 `세리`가 되었고.


또, '다리'라는 이름도 왠지 팔, 다리를 연상케 하여 그럼 '오리'라고 바꿔볼까 하다가, 글타고 포유류에게 조류의 이름을 붙이기엔 또 좀 영 껄쩍지근 하여 다리는 그냥 '다리'가 되었다.


꼬투리 속 완두콩들은 동그란 연둣빛으로 똑같이 생겼지만, 완두콩 꼬투리만 한 어미 뱃속에 조로록 누워있던 이 녀석들은 '같은 배에서 나와도 아롱이다롱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 삽화로 쓰면 딱 좋겠다 싶을 만큼 크기도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암놈, 수놈, 큰 놈, 작은 놈, 빠른 놈, 느린 놈. 꼬물꼬물 아직 눈도 못 뜬 녀석들이 틈만 나면 어미젖을 파고들어 미친 듯이 빨아댔다. 안 그래도 작은 소형견인 두리가 네 마리의 젖통 노릇을 하려니 점점 쪼그라들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어미는 위대하다를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두리는 혀를 턱까지 내 빼물고 헥헥거리면서도, 징그럽도록 딱 붙어 아프도록 쪽쪽 젖을 빨아대는 새끼들에게 그대로 배를 맡긴 채 물 한 모금 안 먹고 버티다가 어느 정도 배가 부른 녀석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 그제야 야윈 몸을 일으켜 제 밥그릇에 물과 밥을 먹었다.


"어이구, 녀석들아 이러다 니 에미 죽겠다."

안타깝지만 딱히 도와줄 순 없고... 그때도 엄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너어무 애잔하다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가만 지켜보니 네 마리 새끼들이 골고루 젖을 먹는 게 아니었다. 유독 덩치가 크고 행동이 빨라 제일 좋은 위치의 젖꼭지를 턱 하니 차지하고 쉴 새 없이 젖을 먹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그 덩치 큰 녀석의 엉덩이에 밀려 간신히 물었던 젖도 자꾸 놓치고 눈먼 두더지처럼 어리버리하는 놈도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 마리가 아예 어미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자꾸 처져 젖을 물지도 못했다. 제일 처음 나온 세리였다. 엄마가 세리를 들어 두리의 젖꼭지를 코 앞에 가져다 놓아주어도 세리는 또 다른 형제들에게 밀려 저만치 나와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세리를 들여다본 엄마가 선천적으로 혀가 좀 이상한 것 같다며 스포이드를 들고 앉아 우유병처럼 물과 우유를 먹였다. 밤늦게까지 그렇게 몇 번 하고서는 어미젖 앞에 놓아주고 온 식구가 잠이 들었는데, 그날 새벽에 나는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두리가 내 침대 위로 뛰어올라와 제 머리를 찧으며 미친 듯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마치 도와달라는 듯이. 내 새끼를 살려달라는 듯이.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다가 두리가 입에 물고 있는 손가락만 한 시커먼 것이 죽은 세리임을 알아본 나는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올랐다. 두리는 세리를 내 앞에 내려놓고 구슬프게 울어댔다. 아무리 작은 몸이지만 한밤에 죽은 짐승의 시체에 모골이 송연했고, 무엇보다도 순하디 순하던 두리의 눈이 절망과 슬픔으로 번들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세월이 많이 흘러 두리의 모습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 밤 내 눈과 마주친 두리의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은 짐승이나 인간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렇게 세리는 이틀밤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아파트 화단에 제일 크고 잘생긴 나무 아래에 세리를 묻어주었다.


슬퍼할 새도 없이 두리는 남은 새끼들의 젖통 노릇을 또 해야 했다. 두리가 야위어 갈수록 남은 네리, 다리, 유리는 점점 살이 오르고 새까만 털에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며 눈동자가 또릿해지고 작은 코가 촉촉해졌다.

엄마는 우리가 두리를 데려왔듯, 새끼들을 한 마리씩 입양 보내기로 했다. 예나 지금이나 백의민족 이자 단일민족이라 그런가 우리나라 사람들 순종 참 좋아한다. 혈통이 확실한 순종 요크셔테리어가 낳은 새끼라는 소리에 데려가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엄마는 남의 집에 보낼 강아지일수록 병치레 안 하고 튼튼해야 뒷말이 없다며 빠릿빠릿하고 건강한 녀석을 먼저 골랐다. 다른 형제들의 곱슬곱슬한 털과 달리 유독 반질반질한 직모이자, 넷 중 유일한 수놈으로 제일 활발하고 민첩하던 다리가 제일 먼저 갈 집이 정해졌다. 새 집에서 잘 살거라~ 눈물의 작별을 하며 다리가 떠나고.


그다음으로는 막내로 태어났지만 제일 덩치가 크고 대신 인물은 좀 떨어지는, 한마디로 제일 못생긴, 유리가 간택이 되었다. 생긴 건 유리보다 네리가 더 예뻤지만, 혼자 사는 노처녀가 키우기에는 작고 약한 네리보다, 인물, 아니 견물은 좀 떨어져도 덩치 크고 튼튼해 보이는 유리가 더 적합할 거라는 게 사람 새끼...(네, 저와 제 동생입니다 ㅎㅎ)를 둘이나 키워본 우리 엄마의 판단이었다.


뒷이야기를 미리 해보자면,

좋은 집으로 입양 간 다리는 일 년쯤 지났나... 열린 문틈으로 나가서 그 길로 영영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신탕집에 팔려갈 누렁이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도시의 아파트에서 잃어버렸는데 영영 못 돌아온 걸 보면, 한눈에 보기에도 혈통 좋아 보이는 녀석을 누가 맘먹고 데려가 키우거나, 애완견 가게에 팔아넘긴 게 아닐까.. 훗날 우리끼리 추측을 해보았다.


그리고 막내 유리는 '여자팔자 뒤웅박' 이라더니 "개팔자 주인웅박'이라고 그 못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식도 남편도 없고 돈은 많은 골드 미스의 집으로 가 그녀의 자식이자, 친구이자, 애인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며, 나도 못 먹는 꽃등심 한우 육포를 간식으로 먹고 개전용 미용샵에서 머드팩까지 하고 잘 살다가 말년에 심장에 병에 생겨 고생을 좀 했다. 유리 엄마는 정 안되면 바다를 건너 존스 홉킨스라도 데려갈 기세로 한국의 내로라하는 동물병원의 최첨단 의료진들을 사방팔방 찾아다녔지만, 현대 수의학의 힘이 거기까지였던 듯, 혹은 여기까지가 유리의 운명이었던 듯, 유리는 결국 몇 해 후 안동포로 만든 개전용 수의까지 입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아마 법적으로 가능했다면 상속까지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가끔 다시 태어나면 유리로 살아보고 싶다며 좋은 주인, 아니 엄마를 만난 금수저 유리를 진심으로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다리가 먼저 떠나고 아직 두리 슬하에 유리와 네리가 남아있던 어느 날 저녁, 엄마는 강아지들을 두리에게서 떼어놓고 '산책할까?' 두리에게 말을 걸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지 새끼 한 마리 없어진 거 눈치가 빤할 텐데. 저 속을 어쩔거누... 혀를 끌끌 차던 엄마는 내내 두리가 신경이 쓰였나 보다. 영특한 두리는 평소에도 산책할까? 하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알아듣고 자기 목줄이 들어있는 서랍장을 발로 긁으며 '어서 어서요.' 하듯 재촉을 했고 밖에 나가는 걸 좋아했다. 그랬던 녀석이 온종일 새끼들의 젖통 노릇을 하느라고 꼼짝도 못 하고 있었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기운 없이 늘어져있던 녀석이 오랜만에 들은 산책할까 소리에 귀를 쫑긋하더니 비척거리며 제 집에서 기어 나왔고, 마침 집에 계시던 아빠가 선뜻 산책을 시키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이기적인 Grumpy Oldman인 아빠지만, 술에 취해 늦게 오건, 야근하고 늦게 오건, 365일 24시간 만날 때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꼬랑지를 흔들며 헤어진 님 본 듯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이 속없는 짐승에게만은 속절없이 너그러웠었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아빠가 바깥 바람을 오래 못 쐰 녀석을 딱해하며 "아이구, 어이구 힘들지.. 가자.가자..." 하고, 오랜만에 외출에 신이 난 두리는 신이 나서 귀를 팔랑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기억하는 두리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P.S 여기까지 썼는데, 위에 등장하신 우리 집 Grumpy Oldman의 목소리가 또 들리는 듯하다.

"개새끼들을 가지고 썰을 어디까지 푸는 거야. 너무 길어, 지루해. 고마해."

이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던 장중딩이 기억하는 네리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려서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으니, 늙은 딸이 된 지금이라도 아빠 말을 잘 들어야지.

두리의 마지막과, 네리 이야기는 다음화로 이어가련다.


혹시 앞이야기를 못보셨다면^^

https://brunch.co.kr/@younhana77/257


*이미지 출처 : 꼴찌 강아지 삽화 /

- 저자 프랭크 애시 / 그림 프랭크 애시

번역 김서정

출판 마루벌

발행 201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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