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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기억하는 개

<어쩌다 개 3부작>

by 한아


<지난 이야기>

세리, 네리, 다리, 유리를 차례로 낳고 새끼들 젖통 노릇을 하느라 꼼짝 못 하는 두리. 아빠는 바깥바람을 오래 못 쐰 녀석을 딱해하며 "아이구, 어이구 힘들지.. 가자. 가자..." 하고 산책을 시키겠다 자처하셨고. 오랜만에 외출에 신이 난 두리는 신이 나서 귀를 팔랑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기억하는 두리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두리와 산책을 나갔던 아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혼자 집으로 들어왔다. 한참 기승을 부리던 여름 더위가 물러가고 저녁 무렵이면 바람이 선뜩해지는 요즈음 같은 날씨였던 듯한데, 나의 기억 속의 아빠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더워서가 아니라 혼란과 당황과 공포로 온몸의 땀샘이 고장이 나버려 솟구치는 식은땀이었다.


"두리는?" 이라는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아빠는 이번에는 온통 시뻘게진 얼굴로 현관 신발장 공구통에서 삽을 꺼내 들었고, 묻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한 우리는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으니까. 병원에 데리고 갈 시간도 주지 않고 두리는 그렇게, 새끼들로부터의 잠깐의 자유를 찾아 나선 산책길에서, 영영 자유로워졌다. 편히 쉬어라. 두리야.


우리는 세리를 묻었던 크고 잘생긴 나무 아래 두리를 나란히 묻어주었다. 세리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남아있는 새끼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깜깜한 땅속에 혼자 누워있었을 아기 세리는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고 와준 엄마가 반가웠을게다. 두리도 두고 가는 새끼들이 안타까웠겠지만 그렇게 거기서라도 돌볼 새끼가 있어 다행이었을 것이다.


'고작' 개의 죽음을 두고 무슨 '개도 안 물어갈 신파'를 쓰고 앉았냐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집에 와 인연을 맺은 순간부터 그것들은 '고작' 개가 아니라, 우리의 자식이요, 동생이며 식구 같은 존재로, 위로이자 기쁨이요 행복이었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목줄이 팽팽해질 정도로 두리는 평소보다 신나 하며 흥분했고, 횡단보도에 섰을 때, 두리를 안아 올리려던 아빠의 동작보다 차도로 내려선 두리의 동작이 반박자 빨랐고, 하필이면 그 찰나에 인도에 바짝 붙을 듯 달리던 오토바이가 지나갔을 뿐. 그 모든 '그때'가 '하필이면'과 절묘하게 맞물려 그렇게 된 것일 뿐. 그 치밀한 계산과 계획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때로는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다.


우리 가족은 묻지 않았다. 두리가 어떻게 된 건지. 그날의 산책을 자처했고 그 시간 동안 두리의 보호자였던 아빠가 누구보다 죄책감에 괴로워할 것을 알기에, 모두 슬퍼하면서도 일부러 아무도 두리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른 척하며, 남아있는 네리와 유리를 돌보는데 집중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두리의 죽음에 일종의 공범이 되었다.


이제 두리와 세리는 나란히 흙이 되고, 이듬해 연둣빛 새순으로 다시 돋아나 그 후로도 지금까지 초록잎으로 피고 지고 있다. 가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멍멍' 으로 들리기도 한다면, 구라도 정도껏.이라고 하겠지.




두리가 죽기 전, 장차 금수저가 될 운명의 유리는 이미 골드미스댁으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있었지만, 네리는 너무 작고 약해서 살도 좀 찌우고, 더 튼튼하게 키운 다음 입양을 보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출생에서 '잘생김'으로 이미 제 할 일을 다한 애비는 이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에미는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했으니, 남은 아기들은 하루아침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가 되었다. 얼마 후 유리도 떠나고, 두리의 빈자리를 네리가 대신하면서 자연스럽게 네리는 어디에도 보내지지 않고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우리 엄마는 두리 엄마,

나는 두리 언니였으니,

두리의 딸인 네리에게

우리 엄마는 할머니,

나는 이모라고 해야 하나.

새로운 호칭 문제를 잠시 고민했으나,

안 그래도 반려견을 키우지 않는 사람들이 보기에

개를 안고 엄마가~, 언니가~ 하는 게

뭣들 하는 짓거리인가 우스워보일텐데,

개를 보고 할머니가~, 이모가~ 했다가는 신고를 당할지도 모를 일.

뭣보다, 부르기가 번거로워

그냥 <족보를 리셋> 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다시 '네리 엄마',

나는 다시 '네리 언니'가 되었다.


한 뱃속에 들어있던 동기간 중에 제일 작고 약했던 네리는 시간이 지나며.... 계속 작았다.

어미 젖대신 우유와 사료를 먹으며 튼튼해지고 살도 오르긴 했지만, 완전한 성견이라고 볼 수 있는 생후 1년이 훌쩍 지나고서도 여전히 1.5kg 정도밖에 안 되는 초소형견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찌는 재수 없는 기지배 같았다고 할까.


두리는 상당히 영특한 개였다. 아득한 옛날, 스코틀랜드의 조상의 DNA로부터 전해진 쥐잡이 사냥개의 본능이 남아있는 듯, 민첩하고 재바랐으며, 사람 말도 잘 알아듣고, 심지어 때로는 마음을 읽는 듯도 했다. 내가 슬프거나 힘이 들 때, 조용히 작은 엉덩이를 내게 붙이고 앉아 가끔씩 그 말간 눈을 들어 나를 보는 두리를 보고 있자면, 얘가 내 맘을 알고 지금 나를 위로하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근데, 딸은 아빠를 닮는다는 게 인간뿐 아니라 개의 세계에서도 통하는 속설인가 보다. 네리는 엄마가 아니라 잘생긴 지 애비를 닮은 듯했다. 두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들이 유치원도 가기 전에 뗀다는 '손, 기다려, 누워' 이걸 가르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손! 손! 소오온!!!' 외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바리 눈치를 보다가 꼬랑지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기다려!' 하면 살짝 한번 쳐다보다 낼름 먹어버리고, '으이그! 그걸 못 참아!' 야단을 치면 슬금슬금 궁뎅이를 들이밀며 배를 뒤집고 긁어달라고 애교를 부렸다. 한마디로 애가 좀...

띨띨했다.


그러나, 이런 네리에게도 타고난 재능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녀는 예뻤다.

매우 예뻤다.


요컨대, '생긴 게 재능'이고 '미모가 특기'였다. 요크셔테리어는 종의 특성상 어릴 때는 까만 털이지만 성견이 되면 머리와 얼굴 가슴 쪽은 황갈색, 몸통은 회색이 섞인 짙은 감청색이 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네리는 머리와 가슴털색이 금발이었다. 게다가 메롱~하듯 혓바닥을 항상 귀엽게 빼꼼 내밀고 있어서 가만히 있으면 실물 크기의 인형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끔 소형견이나 단두종들이 턱이 좁고 구강 내 공간이 작아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얼굴이 너무 작아서 혓바닥이 다 안 들어갈 정도다... 뭐 이런 뜻이 아닌가 싶다. 이런 아이들을 '메롱과'라고 부른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여리여리 '쪼마난' 몸집에, 동그란 눈은 잘 익은 머루처럼 새카맣고, 주먹만 한, 아니 주먹보다도 작은 얼굴에 늘 혀를 살짝 빼물고 있는 '금발의 네리'는 인간으로 치면 '백치미의 극치'였다. '백치 아다다'의 멍멍이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좀 멍청하면 어떻고, '손, 기다려' 좀 못 알아들으면 어떠한가. 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고 존재 자체가 기쁨인데.


이쁘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저절로 실실 웃음이 나오질 않나. 차은우, 박보검, 장원영이 전 국민의 최고의 개그맨이 아닌가. 우리 가족에게 네리는 보기만 해도 이쁘고 귀여워서 저절로 활짝 웃게 되는 최고의 웃음 버튼이었다. 나는 이제 여성의 미모가 최고의 능력이자 권력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회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회 부조리에 치여 마음이 고단한 날이면, 나는 가끔 네리를 안고 부러움에 가득 찬 혼잣말을 했다.

"넌 좋겠다. 이뻐서."


작고 약해 보였던 네리는 다행히 크게 아픈데 없이 나이를 먹어갔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의 머리카락이 하얘지듯, 나머지 털도 점점 금발로 변해 '늙은 개'가 되어서도 여전한 미모를 자랑했다. 제 어미 두리처럼 여자로 태어나 지 새끼 낳는 기쁨 한번쯤 누리게 해보려고도 했지만, 동물병원 의사샘 말이 너무 작아서 임신과 출산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포기했다. 네리가 10살쯤 되었을 무렵에 지금의 장중딩이 된 '꼬꼬마 장'이 우리의 삶에 등장했고, 그때부터 우리 집 최고의 웃음 버튼은 네리가 아닌 '꼬꼬마 장'이되긴 했지만, 여전히 '금발의 작은 네리'는 우리의 기쁨이자 미소천사였다.


금발이 너무해. 점점 온몸이 blond 가 된 금발의 네리


메롱하는 저 혓바닥이 매력 뽀인뚜!!
이 무렵에는 이미 한쪽 눈의 망막이 뿌옇게 되어 앞이 잘 안 보이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던....




개의 수명은 15~20살이라고 한다. 관리를 잘하면 스무 살이 넘어서도 살 수 있다고 하나, 생후 1년이면 이미 성견으로 간주되는 개의 나이 20살이면 인간으로 치면 100살을 훨씬 넘긴 셈이고, 특히 네리처럼 소형견은 보통 수명이 더 짧다.


14살이 된 네리는 이제 완연히 늙은 개였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건강관리를 해주었지만 인간이나 개나 자연적인 노화의 진행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머루같이 새카맣던 눈동자는 뿌옇게 색이 변했고 눈가는 짓물러 앞이 잘 안 보이는 네리는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벽에 부딪치곤 했다. 이내 그마저 뜸해져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간혹 가다 쌕쌕거리는 숨을 힘겹게 내쉬기도 했다. 작은 몸이 노쇠해지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얇은 유리 같아서 엄마는 목욕을 시킬 때마다 조심스러워하며 안쓰러워했다.

"아이고. 살아있는 건 참...애잔하다. 너를 어쩌면 좋으냐.."


꼬꼬마 장이 아장거리던 4살 무렵이었다. 쉴 새 없이 집안을 볼볼거리고 돌아다니던 녀석의 눈에 소파에 누워있는 네리가 들어왔다. 어린 눈에도 이 작은 개가 조심스러워 보이긴 했나 보다. 살금살금 만져보고 건드려보길래 한번 안아보라고 안겨주었다. 나이로 치면 할머니를 넘어 증조할머니뻘 되는 개였다. 제 딴에는 조심해서 안는다고 했지만 아이의 손길은 서툴렀고, 기어이 개를 놓쳤다. 놓친 개는 소파 아래로 떨어졌고 시름시름하던 네리는 그 후 얼마 안 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소파에서 떨어진 것이 네리의 죽음에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소파는 그렇게 높지도 않았고 아래에는 카펫도 깔려 있었다. 젊은 개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상황이지만, 인생이 늘 그렇듯, 그럴 때 추락하는 개는 '하필이면' 당장이라도 깨질 유리같이 약해져 있는 노쇠한 개인 것이다.


두리처럼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예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이별이었기에 네리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두리가 죽었을 때처럼, 우리는 알면서도 묻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만약 그때, 네리를 놓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네리가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네리는 다만 몇 달이라도, 아니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었을까.

묻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네리의 죽음에 공범이 되었다.


네 살이면 과실치사의 죄도 묻지 않는 연령이다. 그러나 네 살 아이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 있고, 생각하기도 싫은 비극이지만, 어쩌면 그 대상이 '개'가 아니라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라도 사람을 상하게 했다면 법적으로 성인은 처벌을 받는다. 나중까지도 우리가 네리의 부재에 대해 의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은 건 이런 원초적인 죄의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다른 가족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어쩌면 '개의 죽음을 앞당겼을지도 모르는 실수'를 한 아이의 엄마여서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 아이도 멍멍이는 어디 갔냐고 묻지 않았고, 그렇게 네리는 우리 기억 속에 묻힌 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중학생이 된 아이의 기억 속에 네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우연히 '파블로프의 개'에서 시작된 말장난이 플란다스의 개, 무지개, 지우개, 안개를 거쳐 '네리' 로 이어졌고 나는 놀라서 물었다.


"어? 너 네리를 기억해?"

"응, 어렴풋이"

"나는 니가 네리를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뭔가 디게 조그맣고 복실복실했던 것 같아."

나는 이 얘기를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네리가 죽은 것도 기억해?"

"글쎄...그냥 할머니 집에 강아지가 있었다 정도...?"

"강아지가 아니라 이미 그때 왕할머니 개였어. 그런데 너 네리가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장중딩에게 그날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네리가 죽은 게 너 때문은 아닐 거라고, 이미 약할대로 약해져서 아주 작은 충격으로도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덧붙였다.

"내가 그랬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듯했지만, 이내 다소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근데, 그 얘기 지금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나.. 죄책감이라도 가져야 하나. 몰랐는데 엄마가 말하니, 디게 미안하잖아. 네리한테."

"죄책감 가지라고 한 이야기는 물론 아니야. 말했듯이 꼭 니 잘못이라곤 할 수는 없어. 다만, 넌 그때 아기였지만 어른들의 경우 실수로 저지른 잘못이라도 '과실치사'로 처벌을 받거든. 문득, 몰라서 저지른 죄가 어디까지 처벌을 받는 것이 정당한가 대해 궁금해졌어. 그래서 너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


나는 장중딩에게 전혀 의도치 않게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게까지 할 수 있으니 항상 위험한 행동을 자제하고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이가 네살때 한 일을 가지고 과실치사 운운하는게 지나친 확대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의 장난같은 비극은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조심해서 나쁜 건 없지 않을까 싶다.


장중딩이 내 동생, 그러니까 장중딩의 삼촌이 두리를 데려다 키우자고 조르던 나이가 되었을 무렵, 강아지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늘 '안돼' 단호한 거절이었다. 인간이 한 생명을 오롯이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가 얼만큼인지,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며 확실히 알게 되었고, 슬픈 결말을 아는 영화처럼 나보다 먼저 죽을 것이 분명한 한 생명을 거둬 그 이별을 또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두리와 세리를 나란히 묻은 그 잘생기고 큰 나무 아래 네리를 묻어주었다. 이미 두리와 세리가 수없이 푸른 잎으로 피고지고 한 그 나무는 세월이 흘러 4층 우리집 거실 창문에서도 보일만큼 키가 커져 있었다. 열린 창으로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이제는 '멍멍' 이 아니라 '멍멍멍' 으로 들리곤 한다면 내 구라가 진화를 거듭해 개구라가 되었다고 피식.하려나.




'파블로프의 개'에서 시작한 말장난이 플란다스의 개-무지개-지우개-안개를 거쳐 네리로 이어지고.. '어? 네리를 기억해?' 이 한마디로 장장 30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어쩌다 개3부작>이 되었다. 뭔가... 땅 위로 솟은 작은 돌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는데 땅을 파고 보니 그 아래 바위가 있더라...뭐 이런 느낌이다.


우리집 Grumpy Oldman의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그 개 몇마리로 아직도 썰을 풀고 있냐. 작작 좀 해라. 지겹다."

그러고는 돌아서 작게 한마디 할지도 모르겠다.

"미친년, 그날 밤 일은 왜 새삼 꺼내고 Giral이야. 언제적 일인데..."

어쩌면, 슬쩍 눈물을 훔칠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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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개3부작> 전편을 아직 못보셨다면....

https://brunch.co.kr/@younhana77/257

https://brunch.co.kr/@younhana77/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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