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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우물

by 한아


우연히 떠오른 한 단어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난 며칠 간 나를 사로잡은 단어는 '심정'과 '심경'이었다. 아마 어떤 책이나 혹은 신문을 읽다가 그날따라 유난히 '심정'이라는 단어에 꽂혔던 듯하다.


'참담한 심정? 참담한 심경? 뭐가 맞는 거지?

'심경의 변화'는 들어봤는데, '심정의 변화'는 좀 이상한 걸.. 뭐가 다르지??'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심정'의 뜻이 자그마치 9가지나 되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제일 처음에 나온 1번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단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1번에도 또 세 가지의 뜻이 있다는 것. 예문을 하나하나 읽어보니 그중에 또 첫 번째인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단어의 가장 적확한 의미였다. 일상에서 늘 쓰는 단어인 '심정'이 이렇게나 많은 뜻이 있었구나. 복잡해서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왕 사전까지 찾아본 거, 좀 더 살펴보고 싶은 '심정'이 생겼다.

심정 1 心情

명사

1.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다.

-심정이 상하다.

-사업에 실패하자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제가 이렇게 악담을 퍼붓는 심정도 넉넉히 짐작하시리라 믿습니다. 출처 <<최인훈, 구운몽>

2. 마음을 쓰는 태도.

-곧은 심정.

-심정이 착해서 마음에 든다.

-당신네의 사랑은 이 못된 놈의 비틀어진 심정도 뒤흔들어 놓고야 말았소. 출처 <<현진건, 적도>>

3. 좋지 않은 심사.

-영권이 저는 색시가 없는 게 아무래도 심정이 나는 모양이다. 출처 <<이정환, 샛강>>



'심정'에 쓰이는 한자는 마음 심, 뜻 정이다.


情 뜻 정
부수 忄 총획 11획 1. 뜻 2. 마음의 작용(作用) 3. 사랑


한자어를 그대로 풀어보면 <마음속에 품은 뜻>, 즉 마음속의 생각이나 감정이다. 구체적인 생각 혹은 감정의 내용을 앞에 붙여 ~한 심정이라고 활용한다. 예를 들어,

<시간을 초과했는데도 게임을 끝내지 않고 있는 장중딩의 등짝을 한대 뚜드려 패고 싶은 심정이다>처럼.

그런데 왜 대체 저 녀석은 약속을 안 지키는 걸까. 정말 화가 나는 심정? 화가 나는 심경? 이건 둘 다 그럴듯한데...?? 음.. 헷갈리기 시작. 그래서 이번에는 <심경>을 찾아봤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심경'을 찾아보면 7가지의 뜻이 나온다. 그중에 두 번째가 내가 생각한 단어의 뜻에 가장 적확해 보인다.

심경2 心境

명사

1. 마음의 상태.

-복잡한 심경.

-그의 태도가 아주 달라진 걸 보니 그동안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보다.

-지금의 이 참담한 심경을 한마디로 형용하기는 어렵다.

-산꼭대기에서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황제의 심경은 비통하였다. 출처 <<이문열, 황제를 위하여>>


'심경'은 '마음 심'에 지경 경을 쓴다.

境 지경 경
부수 土 총획 14획 1. 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2. 경계(境界), 국경(國境) 3. 경우(境遇)


사전을 찾기 전에는 심경의 '경'이 '지경 경'인 줄 몰랐다. '국경', '경계', '환경'에 쓰이는 한자 경(境)이 '심경'이라는 단어에도 들어가 있으니, '마음의 경계' 정도로 이해하면 되려나. 그런데 '심경'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의 상태'이다.


처음엔 마음의 경계가 내 마음의 상태라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을 땅 혹은 내 안의 토지라고 생각해 보면, 땅이 미치는 범위가 곧 내 마음의 범위일 테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의 경계, 즉 '심경'이 '마음의 상태'라는 것이 이해가 가는 듯도 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에 어떤 생각(심정)을 품으면, 그 생각으로 인해 내 마음이 어떠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마치, 땅에 씨앗 하나를 심으면 그 씨앗이 자라 땅 아래서는 뿌리를 내려 범위가 넓어지고, 땅 위에선 나무가 자라 그 잎이 만든 그늘의 범위가 넓어지듯이 말이다.

내친김에 영어사전에서 '심정'과 '심경'을 찾아보니, 둘 다 feeling, heart라고 나온다. 우리말처럼 그다지 구분하지는 않고 쓰는 듯하다. 혹은 모르지, 구분하는 단어가 있는데, 네이버 영어사전 편집자가 그런 차이점까지는 관심이 없었는지도.


<심정>이 what이라면 <심경>은 how라고 생각하면 될까.

'억하심정'은 '도대체 무슨 심정이냐'의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TV에서 고개를 숙인 피의자들에게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지금 심경이 어떠십니까?'라고 하는 것을 듣는다.


<심정>이 마음속에 든 생각의 어느 한 점, 이라면 <심경>은 그 점을 중심으로 생긴 면이라고도 생각을 해봤다. 그러니까. '너의 마음속 무슨 생각'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태'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어떠하다'라고 해야 마땅하며, 점이 아니라 면이니 마치 그라데이션으로 색칠한 그림처럼 시간이 지나며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게임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장중딩의 등짝을 뚜드려 패고 싶은 심정'으로 생겼던 '화나는 심경'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누그러지고, '그래, 어른인 나도 재미있는 유튜브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한참 게임 좋아할 나이에 저러는 것도

당연하지'라는 심정이 들며, '조금 너그러운 심경'으로 '심경의 변화'가 생겼듯이 말이다.



생각의 길을 따라 둘레둘레 걷다 보니 어느새 꽤 멀리 와버린 듯하다.

사전에는 없지만 내 맘대로 심정(心井)이라는 단어를 하나 만들어본다.

<마음의 우물> 내 마음속의 우물에는

지금 깨끗한 물이 고여있을까, 더러운 물이 고여있을까.

새벽에 눈 비비고 일어난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갔다는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깨끗한 물일 수도.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싸우다 한 마리가 죽어 썩어버렸다는

김민기의 '작은 연못'처럼 더러운 물일 수도.

전자라면 동물들은 물론 사람들도 불러 모아 마음껏 마시게 할 것이고,

후자라면 바닥까지 퍼내고 다시 깨끗한 물을 채워 넣을 것이다.

심경 3 心鏡

1. 명사 마음의 거울.

2. 명사 맑고 밝은 마음


네이버 국어사전의 '심경'의 3번째 뜻은 '마음의 거울'이다.

깨끗한 거울처럼 '맑고 밝은 마음'이란 뜻도 있다.

<내 마음의 우물>의 표면이 <내 마음의 거울>이 될 것이다.

후회, 좌절, 분노, 절망과 같은 나쁜 심정이 나의 샘에 고이면

잠시 우물가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르고 하늘을 볼 것이다.

우물 옆에 무릎 끓고 기도할 것이다.


고여있는 더러운 물을 퍼내고,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심정,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심정,

옆에 있는 내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심정'을

우물 바닥에서 끌어올려 깨끗한 물로 바꿀 것이다.


그렇게 차올라 깨끗해진 나의 우물은

거울처럼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이리라.

그리고 그 우물가에 선 나는,

그 빛에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활짝 웃을 것이다.




P.S 내친김에 문득 궁금해져서 '심금'도 찾아보니, 마음 심(心)에 거문고 금(琴).

아.. 그래서 '심금을 울린다'라고 하는 거구나...


https://www.youtube.com/watch?v=G7AcxDW0XhU&list=RDG7AcxDW0XhU&start_radio=1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영원한 우리의 지하철 1호선 역장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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