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긴긴 연휴의 첫날이었다.
연애, 일, 미래의 꿈이 인생의 화두였던 꽃처녀 시절에는
긴 연휴의 첫날은 '설레임' 의 동의어였다.
육아, 살림, 현생의 고민이 인생의 당면 과제인
꽃... 인지 풀떼기인지 모르겠는 중년이 된 지금,
긴 연휴의 첫날은 '두려움'의 또 다른 버전이다.
아침에 씩씩하게 손 흔들며 집을 나가
저녁에 반가운 뽀뽀 쪽을 하며 다시 만날 때까지
매일매일 '헤쳐 모여'를 반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하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마찰의 시간과 간섭의 거리를 최소화하던 일상을 벗어나
해 뜰 무렵부터 해지고 나서 까지,
달뜬 후부터 신새벽 아침이슬 맺힐 때까지
그야말로 1분 1초의 틈 없이 꽉 찬 24시간을
오롯이 살부비며 비비적거려야 하는 가족들은,
특히 그 가족 구성원중에
매사 띠꺼운 표정과 틱틱거리는 말투의
중딩이라도 하나 들어있다면,
나의 온 사랑인 그들은
기쁨이자 행복인 동시에
부담이자 귀찮음 이기도 한 것이
대한민국 풀떼기 중년 아지매 중에
비단 나만의 생각이라면
기꺼이 잡초처럼 깔끔하게 뽑혀줄 의향도 있다.
(나만 그런 거 아니쥬?? 맞쥬??)
그날은 그런 기이이이인 연휴의 첫날이었다.
인생 최고의 암흑기를 통과하는 중이라
매일 먹고 사는 것도 힘에 부치는 나에겐,
유례없는 긴 연휴에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로
인천공항이 미어터져 공항 가는 길이 주차장이니
비행기 탑승 시간 전 최소 5시간은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서야 한다는 뉴스는 마치,
화성으로 가려면 최소 78시간이 걸리니
(과학적 근거 없음. 내 맘대로 쓴 거임)
우주선 탑승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여유 있게 집에서 출발하라는 뉴스나 다를 바 없는
'남의 행성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저 이 긴긴 연휴를 부디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특히 '나의 사랑, 나의 아들' 장중딩과
큰 마찰 없이 무사히 끝낼 각오를 다질 뿐이었다.
그러나 열흘은 개뿔, 불과 한 나절도 안되어 나의 다짐은,
'글을 쓰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일'로 인해
첫 번째 붕괴 위기에 맞닥뜨렸다.
기어이 인상을 쓰고,
끝끝내 소리를 지르고,
마침내 화를 내고서는,
잠시 숨을 고르던 사이
오늘이 10일간의 연휴의 첫날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내 너를 껴안고 장렬히 산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미 불이 붙은 불쏘시개를 치워야겠구나.
10년 전만 해도 한 팔로 거뜬히 들어 내 품에 쏙 들어오던 너는
이제 한 팔로 들기는커녕,
양팔로 껴안기에도 벅찬 넓은 어깨의 청소년이 되었네.
널 집어던질 순 없으니
내가 나가야겠다.
그래서 주섬주섬 행장을 꾸렸다.
도전에 의의를 두기로 한 두꺼운 소설책과 노트북 그리고 껌 한 통,
(질겅질겅 뭔가 씹을 것이 간절히 필요했으므로)
델마와 루이스의 한 장면처럼
목에 두른 스카프를 휘날리며
뚜껑 열린 차를 타고 멀리멀리 가고 싶었으나,
이 명절 연휴 첫날 어디 가서 루이스를 찾겠으며,
같이 갈 루이스가 있다 한들 빨간 오픈카와
이 좁아터진 서울 바닥에
막히지 않고 뻥뻥 뚫리는 길은 또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래서 그냥 머리에서 드래곤처럼 김을 풀풀 내며
'그때 거기'로 또 갔다.
장중딩의 시험 전날,
터지기 일보직전의 압력밥솥 같은 상태로 들어섰다가
부잣집 강아지로 환생하고 싶다는
장중딩 또래의 중딩이들의 '개드립'에 빵 터져 푸시식 김 빼고 왔던
날라리 카공족의 아지트,
우리 집 앞 무인 카페 '만월경'
중딩, 고딩이들 중간고사 기간이라,
주인 없는 테이블마다 참고서와 프린트가 가득했던 그날과는 달리
명절 첫날 저녁의 만월경은 아무도 없이 한산했다.
무인 커피 기계에서 1700원짜리 '뜨아'를 한잔 뽑고,
가져간 껌통에서 껌 5알을 꺼내 한꺼번에 입에 쑤셔 넣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씹었다.'
소설책을 펴고, '혹시나' 재미있을까 몇 장 읽다가
'역시나' 재미없구나... 이내 덮어버리고
노트북을 열어 브런치 내 글방문을 열었다.
그리고...고개를 들어보니,
두 잔 째 먹다 남은 커피는 다 식어있었고,
껌통도 반쯤 비어있었다.
글로 도망쳐 글 속에 숨어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솔직히 장중딩 생각 1도 안 났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그제서야, 이 시키는 뭘 하나 걱정이 좀 되었다.
잔소리 대마왕이 퇴장한 후 녀석은
반성하며 제 할 일을 스스로 끝내놓았을까.
혹은 기쁨의 춤사위판을 벌렸을 것인가.
내가 집에서 몇 시에 나왔더라..
6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4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나.
오늘 할 숙제와 읽을 책을 가지고 당장 튀어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엄마 서재방 책상 위 은색 책꽂이 받침대, 영어 모의고사 프린트, 필통, 읽을 책 챙겨서 만월경으로 와.
- 내가 왜 가, 숙제도 다했고, 책도 다 봐가는데, 엄마가 와야지,
- 얼른 튀어와.
- 6시에 나갔는데, 이제 올 때 됐어.
문자를 보는 순간, 풋. 웃음이 났다.
'6시에 나갔는데 이제 올 때 됐어.'
어째, 엄마와 아들의 대사가 바뀐 듯.
근데, 아들아 아직 이 에미는 집에 가기가 싫은 걸.
솔직히 니 생각 1도 안 했다.
책 보고, 글 쓰고, 유튜브도 보고 좋구나 야~
그래도 에미의 가오가 있지.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
나는 기어이 장중딩을 카페로 오게 하여 등짝을 한대 후려치고,
내 노트북 가방과 두껍고 재미없는 소설책을 들게 한 후,
만월경 바로 옆에 위치한 24시간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조스바와 돼지바를 하나씩 입에 물고
만월경처럼 둥근 달을 바라보며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 뻑하면 집을 나가고 그래.
-같이 있었으면 연휴 끝나고 너랑 나랑 '파국' 일 걸.
-작작 좀 하고 와야지, 엄마 집 나간 지 4시간도 넘었어.
-그래? 근데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엄마가 무슨 가출 청소년도 아니고 가출 중년이야?
-근데, 솔직히 니 생각 하나도 안나드라 야.
그니까 니가 알아서 잘하면 되잖아. 이 시키야.
그렇게 우리는 사춘기와 갱년기의 또 한 고개를 손을 맞잡고 무사히 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춘기 아들한테 함부로 나가 이 시키야! 하면 안 되겠구나.
나가보니, 좋드라. 담에 또 나가야지.
나는 '가출하는 풀떼기 중년' 이니까.
P.S 작가님들 긴 연휴의 5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멘탈은 모두 오겡끼데스까~ 이신지요?
남은 기간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시길요^^~
사진 출처: 가출할거야! 지은이: 야마구치 사토시 | 크레용하우스 | 2009년 08월 31일
만월경의 시험기간의 풍경이 궁금하시다면....
https://brunch.co.kr/@younhana77/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