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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by 한아


2025년 10월 26일 일요일


평소와는 조금은 다른 휴일이었다.

10월 31일이 생일인 아이가 친구들을 불러 미리 생일 파티를 했다.

망아지 같은 녀석들 열두 명이 몰려와 왁자지껄 한바탕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에 욕설이 반쯤 섞인 지들만의 언어로 재잘거리더니

이내, 각자의 태블릿과 핸드폰을 들고 앉아 각자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을 초대한 생일자인 아들은 식탁에 놓인 컴퓨터에 앉아 혼자 게임을 하고 있다.

"얘들아 이럴 거면 왜 모였니?"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 또한 그들의 문화인 듯하여 그냥 두었다.


장정 열두 명이 휩쓸고 간 자리를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아

날짜 지난 신문지를 테이프로 붙여 거실이 꽉 차게 깔아주고,

맘껏 먹고 마시고 버려도 좋으니,

나중에 아줌마가 청소할 때 너무 힘들지 않게

이 신문지 위에다가만 버려주면 좋겠다 당부한 후,

쓰레기용 비닐봉지도 여러 개 입구를 벌려 놓아주었다.


그중 한놈이 목발을 짚고, 오른쪽 발부터 무릎까지 깁스를 하고 왔길래

연유를 물으니,

계단 층계참 꼭대기에서 한 번에 점프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몸을 날렸단다.

착지를 무사히 했는데,

하는 순간 온몸에서 빠지직... 소리가 났단다.

유난히 체구가 작고 말라, 종아리 굵기가 우리 아이 팔뚝만 한 녀석은

어쩌면 새처럼 날고 싶었나 보다.

아줌마는 니 맘이 이해되는구나.

그러나 아가, 넌 슈퍼맨이 아니란다.

좀 조심하지 그랬니....ㅉㅉ


이제 좀 괜찮냐 물으니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해맑게 웃는다.

"쟤 한 달 동안 학교도 안 가고 학원도 안 가요. 와씨! 겁나 부러워요."

한 달 동안 학교도, 학원도 못 갈 정도로 크게 다친 녀석이

깁스하고 목발 짚고 엄마 차에 실려 기어이 생일파티는 왔다.

"흐흐. 다리 계속 안 나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 맘도 이해한다.

그러나 아가.. 니 엄마 오그라붙는 맘은 어찌할끄나....


아이들이 노는 걸 좀 지켜보다가

엄마 눈치 없이 편히 놀라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저녁미사를 다녀왔다.

오늘 나의 기도 제목은,

부디 탐욕에 눈이 멀어 또다시 순리를 거스르지 않도록,

지혜를 주세요. 아버지 도와주세요.

기도하면서도 솔직히 하느님이 미웠다.

하느님 욕하고 싶은데 꾹 참았다.

벌 받을까 봐.


집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녀석들은 게임 삼매경.

피자 치킨은 어느 정도 먹었는지 넓게 폈던 신문지를

한켠으로 둘둘 말아 제법 정리 비슷한 걸 해놓고

이리저리 벌판에 벌목해 쓰러진 나무처럼 포개져 게임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놈 한놈 어찌나 튼실하고 창창한지 아름드리나무들이 얼기설기 누워있는 듯 보인다.

녀석들 언제 이렇게 컸니...


그러더니 한놈이 라면 먹을래? 하니 우르르 나도 나도 하며,

미리 놓아둔 컵라면에 물을 부어 후루룩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한 녀석이 야구팬인지 틀어놓은 야구 중계 tv를 보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는 통에 컵라면을 통째로 쏟아

말아놓은 신문지를 뻘겋게 적셨다.


찢어진 신문지 사이로 라면 가닥이 대롱거리고,

마루틈으로 벌건 국물이 스며들고 있다.

내 새끼면 등짝 스매싱을 바로 날렸겠지만,

남의 새끼라 꾸욱 참고...

'흐즈마라흐찌....으스끄야....'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만 말했다.


남은 컵라면 국물에 계란찜까지 야무지게 해먹은 녀석들이 돌아가고 난 후.

거실은 메뚜기떼의 습격 위에 폭탄을 투하한 듯 그야말로 난장판.

깔아놓은 정성이 무색한 신문지는 갈가리 찢겨있고,

소파 사이 틈새, 소파 아래 구석, 식탁 아래 구석,

청소가 까다로운 구석구석과 틈새틈새마다

초코파이 빈봉지, 치킨뼛조각, 퉁퉁 불어 터진 라면가닥

피자 토핑이었던 듯한 정체불명의 까맣고, 빨간 것들이 쑤셔 박혀있고.

도대체 화장실에 초코파이 봉지를 가져다 놓은 시키는

똥 싸면서 파이를 먹은 거냐... 왜 굳이 여기....

혹시나 하고 열어본 전자레인지 안은

계란찜의 후폭풍으로 ... 이하 생략...


오랜만에 이모님 쉬게 하고(가녀린 이모님이 감당불가할 정도였으로)

이모님 모신 후로 광에서 쿨쿨 잠자던 쓰레받기, 빗자루, 물걸레 깨워

좁아터진 마루를 박박 기며 손걸레질 수십 번 하고도,

은은히 남아있는 머슴아들 꼬릿하고 꼬소한 쑥내 빼느라고 고생 좀 했다.


소오올찍히, 귀찮았지만 밉지 않고 너무 이쁜 것들. 와줘서 감사하다.

내 아이 혼자 학교에서 멀찍이 떨어져 살아

다들 사는 곳에서 버스를 타고 왔어야 하는데,

한 반 24명 중에, 여자아이들 빼고 거의 모두가 기꺼이 와준 걸 보면,

멀리 산다 기죽지 않고. 두루두루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이다.


잘 자라준 녀석에게 고맙고 미안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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