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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 Sukwoo Nov 16. 2018

설거지

2017년 1월 7일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동참하지 않은 일이 '가사'였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꾸준히 집안일 중 무언가를 한다. 재활용품이나 폐지를 버리고 설거지를 한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벽에 낀 먼지를 찾아내거나 신발장 속 쌓인 더러움을 마주하여 기어코 정복할 때는 쾌감마저 있다. 주부의 위대한 수많은 일 중 '설거지'가 왠지 마음에 든다면 이상한 성격일까.

먹고 난 그릇과 수저를 따뜻한 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빠르게 닦아낸다. 모순된 문장 같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강원도 태백에 살던 국민학교 시절, 당시 수입 생활용품을 팔던 가게에서 산 이후 쭉 집에 있던 검정 밥그릇을 씻어 손으로 문지를 때 '뽀드득'하는 기분이 좋다. 작년 하순 친한 친구와 가장 불꽃 튀게 나눈 대화 중 하나는 패션이니 디자인이니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작년 파리에 있을 무렵 비슷하게 브뤼셀에 간 철이는 승수네 집 거치형 식기 세척기에서 그 위대함을 똑똑히 경험했다고 했다. 만들자, 사자, 뭔가 하자,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사라진 자리에 보통은 나올 수 없던 대화 주제들이 하나씩 소주잔과 안주 사이를 파고든다. 그 생경함이 조금 시간이 지나도 피식, 웃게 한다. 설거지는 어쩐지 도로를 달릴 때와도 비슷하다. 걸리는 시간이야 훨씬 짧지만, 단순한 노동 아닌 노동에 집중하며 떠오르는 온갖 생각들이 피어났다 사라지는 순간, 그 감각이 참으로.

언젠가 꽤 우울하고 쉽지 않았던 겨울, 이사를 자주 다닌 친구 집에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 들어가 하룻밤 묵었다. 이튿날 아침, 친구가 차려준 밥에는 고구마인지 밤이 들어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지금도 결코 아닌데 꿀처럼 삼켜 먹었다. 뻗친 머리와 적당히 추운 원룸, 주황인지 노란색으로 들어오는 부엌 커다란 창문을 관통한 불빛 아래 잔뜩 쌓인 그 날, 먹고 남은 그릇이니 냄비들이 문득 떠올랐다. 여러 사람이 여기서 저기로, 주위를 떠나던 무렵이었다. 의식의 흐름처럼 그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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