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청년학교 5기 김은미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살아갈까?
이렇게 써 놓고 보니 갑자기 낯설어진다.
그 ‘무엇’이 무엇일까?
‘무엇’
사전에서는 모르는 사실이나 대상을 물을 때, 그 사실이나 대상을 가리킬 때 쓴단다. 또는 확실히 모르거나 꼭 집을 수 없는 대상을 가리킬 때도 쓰인단다(다음사전). 전라도 사투리 ‘거시기’와 같은 말일지도. 뭔가를 꼭 집어 말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무엇’ 이라는 말은 다중의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들어간 ‘무엇’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다. 내가 추구각하는 ‘무엇’의 의미를 톺아보고자 한다.
우선, ‘무엇으로’ 하면, ‘어떠한 것을 가지고’라는 의미가 떠오른다.
나는 어떠한 것을 가지고 사는가? ‘어떠한 것을 가지고’ 는 도구를 지칭하는 의미이지 않을까? 이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여기에서는 돈과 집과 같은 재물을 먼저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관심 없다는 표현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의미가 더 맞겠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무슨 베짱일까? 다다익선이라고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그것을 많이 모을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으니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아껴 쓰고 저축하는 거다. 더 이상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내 능력을 뛰어 넘는 일이 나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니 관심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닐까한다.
그럼, 난 ‘무엇’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가? 권력, 사회적 지위, 명예와 같은 ‘무엇’은 어떨까? 재물보다는 마음이 조금 더 솔깃하다. 그러나 그것도 내 능력을 뛰어넘는 일이다. 난 가진 것도 없고, 사회적 지위 또한 그저 그런 가정주부이다. 지금 이 나이에 새로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얻으려면 재물을 얻는 일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젊었을 때도 없었던 욕망이 이제 와서 꾀일리 없다.
그렇다면, 사랑과 같은 ‘무엇’은 어떨까?? 앞의 둘보다는 더 솔깃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 것 같다. 나에게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하는데, 내가 받아야 했던 사랑은 조건적이었다. 상대의 맘에 따라 달라졌으니 내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했다. 받는 사랑이 조건적이었던 내가 사랑을 주어야 했으니 버거운 건 당연한 이치이다. 사랑은 살아가면서 배워야할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의 서툰 사랑은 살아가고자 하는 도구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럼, 난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이 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내가 추구하는 삶은 어떠한 ‘무엇’이 필요할까? 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은 어떠한 삶일까? 아마도 난 고결한 선비정신, 올곧은 마음가짐과 같은 영적영역의 삶을 욕망하는 것 같다. 해박한 지식,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 나만의 아우라(?)와 같은 영적인 삶을 흠모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제의 내 모습과 많이 다르다.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다. 때문에 늘 나를 의심하고 성찰한다. 대부분 자책으로 이어질 때가 많지만, 그래도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 ‘무엇’을 쟁취하고자 고군분투한다. 이것이 오늘까지 내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무엇으로’의 두 번째 의미로 ‘어떠한 모습으로’도 있겠다. 이는 내가 희망하는 나의 모습,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나의 모습이리라. 예전 대학 진학을 위해 공부했던 때가 생각난다. 늘 앞자리에서 배움의 기쁨을 느끼며 황홀경에 빠졌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내 모습이 가장 맘에 들었다. 여상을 졸업한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다녔던 학원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수학과 국어. 특히, 국사나 세계사 같은 시간은 늘 신세계였다. 공부를 간절히 원했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어 시작한 공부라 가슴에서 이해 가능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자리에 앉아 새로운 지식과 마주하며 벅찬 감정을 느꼈던 모습이 가장 맘에 들었다. 또 한 번 그런 기쁨을 맛보고도 싶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기억은 여러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모습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고, 동네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그 과정이 참 좋았다. 계획한 프로그램을 실행에 옮길 때 느꼈던 뿌듯함이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다음으로는, 궁금했던 과제를 해결하며 한 편의 연구물로 만들었던 모습이다. 혼자서 논문을 썼을 때도 좋았지만, 여러 학우들과 논의하며 공동연구 했던 때가 더 뜻깊었다. 그 과정을 통해 같은 주제라도 상대의 관점에 따라 달라짐을 알게 되었다. 상대와 다른 내 의견을 설득하기도 했고, 내가 아는 지식이 한 없이 작아지는 경험도 했다. 적은 지식이 전부인양 오만했던 나를 반성하기도, 지식의 세계에서 작아지던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내가 조금이나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그 순간 내 모습이 가장 좋았고, 맘에 들었다. 지금도 난 그때 느꼈던 행복을 다시 느끼고 싶어 항상 누군가와 함께하려 애쓰고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계획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 속의 내 모습’ 그것이 내가 바라고 희망하는 모습이 아닐까한다.
‘무엇으로’의 세 번째 의미로 ‘어떠한 의미로’ 또는 ‘가치’도 있겠다. ‘나는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가 이에 해당한다. 해박한 지식과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과 나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계획하고 만들어 가길 바라는 내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라는 의미를 톺아보면서 알게 된 내가 추구하는 삶은 고결함, 뚝심, 성찰, 지식, 성장이 가능한 삶이다. 이러한 삶을 위해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쉽지 않은 답인 것 같다.
‘의미’나 ‘가치’는 유동적인 것이라 내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가장 무섭고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하기에 늘 나를 의심하며 살아간다. 이 길 위의 나는 내가 추구하는 삶을 위해 적당한 의미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그러나 늘 부족한 면만이 보인다. 그로인해 끊임없는 반성과 자책으로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내가 바라고 희망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적지 않은 세월을 지내다 보니 삶은 내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삶의 ‘의미’나 ‘가치’가 중요한 이유이다. 삶을 살아내는데도 말이다. 지금 한마디로 ‘어떠한 의미나 가치를 가지려 한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우나 변함없이 지켜내려 애쓴다. 일상적인 삶에서나 청소년활동에서 내가 추구하려는 그 ‘무엇’을 잃지 않고 꾸준히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현재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최고의 ‘의미’나 ‘가치’가 아닐까한다.
길청을 만나면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그 ‘무엇’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꼭 집을 수 없는 것이기에 오늘 이 순간 내가 선택한 ‘무엇’이 최선의 선택이었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내일의 내 모습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도 한다. 그러한 물음과 답이 가능했던 것은 길청의 학우들과 선생님들 덕분이다.
오래전부터 흠모해오던 모임이었다. 길청은 ‘해박한 지식과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으로 나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계획하고 만들어 가는 것을 원했던’ 나에게 있어 필요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청소년활동가로서 지녀야 할 ‘의미’나 ‘가치’를 함께 고민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때문에 이 모임을 눈으로만 지켜보며 동경해 왔었다. 길청 5기 모집 글을 본 후 지원서를 제출했던 순간까지 가슴이 콩닥거렸다.
길청 안내 글 중
일찍이 월남 이상재 선생님은 “청년이여”라는 글에서 "우리 인생이 인생다운 인생 노릇을 하려면 먼저 저 스스로의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 나를 잃지 않으려면 나를 찾아야 하고 나를 찾으려면 무엇이 나인지를 알아야 한다. 진정한 나를 어디서 찾을까? 인생의 목숨 되는 ‘정신’이 그것이니 어떠한 일에 임하던지 어떠한 물음을 대하던지 내가 거기에 있느냐, 없느냐 하고 항상 스스로를 보살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라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길청에서의 공부는 홀로 고민했던 일들을 학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지만 내가 만들어가야 할 의미나 가치를 찾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자했다. 나는 그렇게 길 위의 청년학교에 입학했다.
길청의 교육과정은 기대이상이었다. ‘청소년활동’에 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현장의 생생함도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지지와 독려는 갈수록 작아지는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청년연구회를 마치고 작성하는 성찰글 또한 길 위에 서 있는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더불어 길청 동료들의 현장이야기를 통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한층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떠한 방향으로 펼쳐질 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길청 입학 전부터 큰 욕심을 가졌었고, 그것을 이루려했다. 여러 난관을 겪으며 자책하거나 낙심하기를 반복하다보니 계획한 대로 살 수없는 게 인생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하여 그 길에만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다른 욕심은 다 내려놓더라도 내가 살아가고 싶은 ‘무엇’을 가지고, 이루고 싶은 ‘무엇’을 위해 ‘의미’나 ‘가치’를 지켜가며 사는 것만큼은 욕심내고 싶다. 이것이 현재의 내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때문에 책을 펼쳐들고, 오늘의 나를 의심하고, 수많은 질문을 반복하며 학우들과 함께 그 ‘무엇’을 만들어 감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