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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정치가 망친 일본 문화

정치는 어떻게 K팝을 몰락시킬까 8화

by 이성윤

폐쇄적인 의회 구성, 자민당의 60년 독주와 더불어 일본 정치의 또 다른 문제는 '세습 정치'다. 일본에서는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다. 가문, 지지 기반, 자금이다. 2021년 10월 31일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당선자의 33.3%는 세습 정치인이었다.


일본의 세습 정치는 심각한 수준이다. 현재 일본 총리인 이시바 시게루는 돗토리현 지사이자 참의원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정치에 입문한 전형적인 세습 정치인이다. 아버지 사망 후 그는 돗토리현에서 중의원으로 내리 13선을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들어 일본 총리 10명 중 7명이 세습 정치인일 정도로 세습 정치가 만연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이즈미, 아베, 기시다 총리 모두 세습 정치인 출신이다. 피격 사건으로 숨진 아베 전 총리는 3대 세습 정치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자민당 간사장(당의 실권자)과 외무대신을 역임했고,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56·57대 총리였다. 동생인 기시 노부오는 참의원과 중의원을 역임했고, 조카인 기시 노부치요는 최근 선거에서 중의원으로 당선됐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도 3대 세습 정치인 출신이다. 아버지는 5선 중의원이었고, 할아버지는 7선 중의원 출신이다. 아들인 기시다 쇼타로는 2022년 10월 총리대신 정무담당 비서관으로 발탁됐다. 쇼타로는 총리인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 부적절한 행동으로 중도 사퇴했지만 그것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4대 세습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기시다 전 총리의 연설 현장에서 테러를 시도하다가 붙잡힌 일본 청년은 평소 일본의 세습 정치에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어떤 경우에서도 테러를 정당화할 순 없지만 그만큼 일본에서도 세습 정치에 대한 분노는 상당하다.


일본에서는 정치 경험이 없는 신인이라도 가문의 든든한 뒷받침이 있다면 쉽게 당선될 수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높은 지명도, 탄탄한 선거구, 풍부한 정치자금이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둔 일본 정치인은 공공연하게 지역구 후계자로 자신의 자녀를 지목한다. 비록 자신은 물러나지만 자신의 유지는 자녀들이 물려받아 이어나가기 때문에 은퇴해도 은퇴한 것이 아니게 된다.


문제는 정치 경험 없는 신인 정치인이 오직 가문의 힘으로만 당선돼 어떤 정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냐는 것이다. UN 기후변화정상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여해 "기후 변화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라고 말해 인터넷에서 숱한 밈과 한국에서 '펀쿨섹좌'로 알려진 고이즈미 신지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아들이다. 그는 최근 일본 총리에 출마해 3위를 기록했다. 고이즈미, 기시다 전 총리의 아들들처럼 아버지 힘만 믿고 고위직에 발탁되는 현실에 일본 국민들이 어떤 정치적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유능한 인재들이 의회에 진출하지 못하고 오직 가문의 힘을 등에 업은 신인 정치인들이 주요 자리를 꿰차면서 ‘무능력한 정치’가 일본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1996년 이후 진행된 8번의 중의원 선거에서 신인 정치인의 당선 비율은 고작 20%대에 불과했다.


50대 이상 아저씨들의 폐쇄적인 의회, 자민당의 60년 독주, 만연한 세습 정치까지. 다양성을 잃은 일본의 정치는 새로운 정치 비전을 상실한 채, 무능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일본 경제가 일본 문화를 다시 부흥시킬 수 있는 뒷받침이 될 수 있을까?


다음 편에 계속


<정치는 어떻게 K팝을 몰락시킬까>

[프롤로그] 정치는 어떻게 K팝을 몰락시킬까?
[1화] K팝의 성공은 '다양성'이었다.
[2화] MZ세대는 왜 집회 현장에서 K팝을 틀었을까?
[3화] K문화, K정치와 충돌하다.
[4화] 정치는 어떻게 홍콩 영화를 몰락시켰나.
[5화] 중국 콘텐츠는 왜 세계를 장악하지 못할까?
[6화] K팝이 쫓던 J팝은 어쩌다 K팝을 벤치마킹하게 됐을까.
[7화] 자민당의 60년 독주가 망친 일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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