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발리
그냥 콘퍼런스 때문에 간 거였거든.
그런데 거기서 만난 바람, 햇살, 사람들이...
나를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만들더라.
뭐랄까, 예상하지 못한 선물 같은 여행이었어.
너는 발리 가봤어? 어땠어?
나는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정말 생각도 안 했던 곳이었거든. 전혀 관심도 없었고. 그런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겨서 가게 됐지.
발리에서 콘퍼런스 같은 행사가 있었고, 내가 발표를 해서 초대받았어. 왕복 항공권은 공짜, 호텔도 일부 지원. 행사는 이틀 동안 진행됐고, 남은 4일은 혼자 휴가를 즐기기로 마음먹었어.
이 글은 그 휴가 중 특별했던 하루를 기록한 이야기야.
2025년 6월 15일
점심때쯤 마사지를 받으러 갔어. 나는 부드러운 마사지를 좋아하는데, 발리니즈 마사지는 타이 마사지랑 다르게 훨씬 부드러워서 내 취향에 딱이더라. 아, 정말 좋았어.
마사지받고 나니 배가 고팠어. 절벽 해안가 풍경을 담고 싶어서 고젝을 불렀지. 고젝은 우리나라 택시 같은 자동차나 오토바이 서비스야.
차에 올라타자마자 노점상 할머니가 숯불에 구워주는 바비 사테 파는 곳으로 향했어.
할머니의 손길은 느릿느릿하면서도 정성 가득했어. 숯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고... 그 냄새는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어. 할아버지가 참새를 구워주던 아궁이 앞으로.
그렇게 맛있게 구워진 사테를 사서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다 먹었지. ㅋㅋㅋㅋㅋ
도착해서 차에서 내려 길처럼 보이는 좁은 길을 따라 해안 절벽 쪽으로 걸었는데... 정작 그쪽에는 길이 없더라고.
대신 풀을 뜯고 있는 소는 있었지.
사람들이 다닌 흔적도 거의 없었어. 풀숲을 헤치며 걷다 보니 멀리서 빛이 반짝였어. 조심스레 나와 보니 아찔한 해안 절벽이 펼쳐졌지.
위험해 보였고, 내가 원했던 곳은 아니었어.
다시 돌아가야 했어.
다행히 내 고젝 기사님이 거기서 기다리고 계셨고, 상황을 설명하며 근처에 사람이 있는 다른 포인트로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지. 기사님은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
5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 사람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어.
좁은 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시원하게 펼쳐진 해안 절벽이 나타났어. 뜨거운 태양 아래 눈부시게 펼쳐진 풍경에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지.
이거야, 이런 게 내가 찾던 거였어.
근처에 나 말고는 외국인은 없었고, 현지인도 거의 없었어.
'만약 여기서 사고라도 나면 아무도 모를 텐데...'
하는 생각에 조금 무섭기도 했어. 그래도 몸을 움직이니 잡생각이 사라져서 계속 걸었지.
곧바로 가방을 내려 삼각대와 카메라를 꺼냈어. ND 필터를 끼워 장노출 촬영을 시도했지. 몇 번의 시도 끝에 B급 정도의 사진은 건질 수 있었어.
썰물 때여서 파도가 강하지 않았거든. 파도가 강해야 물결이 더 선명하게 보이고, 장노출에 잔상이 남는데... 썰물이라 물이 빠져 잔잔했어.
그래서 아쉬움이 컸지.
뭐, 그래도 괜찮았어.
내가 촬영하는 모습은 현지 분이 찍어주셨어. 이번 여행 동안 내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 뜻밖에 소중한 순간을 남겨주셔서 정말 고마웠어.
그분과의 만남이 내게는 특별한 선물처럼 느껴졌거든. 편의상 그분을 W라고 부를게.
이 지역은 신호가 거의 잡히지 않았어. 가끔 겨우 잡히는 곳이 있을 뿐, 대부분 휴대폰 신호가 닿지 않는 곳이었어. W는 내 사진을 찍고는 뜨거운 태양을 피해 이내 그늘 속으로 사라졌어.
나는 한참 동안 촬영을 했지만, 여기서 건진 사진은 고기 잡는 어부 사진과 해안 절벽 사진 그렇게 두 장뿐이었어.
그래도 충분했어.
이제 반대편 해안으로 이동할 계획이었고, 나는 W를 불러 같이 그쪽으로 향했지.
반대편 해안은 나들이 나온 연인들과 소규모 무리들이 제법 있었어. 역시 현지인이 대부분이었고, 사람 수는 많지 않았어.
뭔가 비밀스러운 해변 같은 분위기였어.
아는 사람만 알고, 현지인들만 찾는 그런 곳 같았어.
풍경이 너무 화려하거나 멋지다기보다는... 그곳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더 크게 다가왔어.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장소였어.
참 신기하지, 이런 기분.
좁은 절벽 길을 따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어. 가는 길에 맛있어 보이는 물고기를 숯불에 구우는 남자를 만났어. 이름은 Yos였어.
낚시꾼들이 많길래 낚시로 잡았냐고 물었더니, 의외로 수산시장에서 사 왔다고 웃으며 말했어.
"수산시장에서 사서 직접 구우면 훨씬 싸고 맛있다"는 팁도 알려줬어.
이런 꿀팁은 정말 고마운 거야.
Yos는 가구 회사에 다니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놀러 왔다고 했어. 남자 셋, 여자 셋이라 커플끼리 온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그는 그녀들을 자매처럼 생각한다고 농담 섞어 말했어. ㅋㅋㅋㅋㅋ
해변으로 내려와서 둘러보던 중, 문어도 발견했어.
손바닥보다 작은 문어가 바위틈에 숨어 팔을 내밀고 있었는데, 독성이 강한 문어도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서 손으로는 만지지 않았어.
대신 조금 전 먹은 사테 봉투 안에 남은 찌꺼기를 문어 앞에 두었어.
문어가 호기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슬쩍 놔봤는데, 팔로 사테를 살짝 건드리기 시작했어. 하지만 곧 지루해진 듯 휙 내팽개치고는 다시 바위 속 원래 자세로 돌아갔어.
뭔가 귀여웠어.
'뭐 찍을 게 없을까?'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었어.
작은 절벽 아래에서는 물놀이를 즐기는 소년들이 있었고, 나는 셔터를 눌렀어. 찰칵!
그리고 문득 내 발도 찍었어. 찰칵!
나와 함께 있던 W도 카메라에 담았어. 찰칵!
그렇게 소소한 순간들을 사진에 담으며, 이 하루가 조금씩 특별해지고 있었어.
나는 다시 문어가 있던 자리로 향했어. 앞에 둔 사테를 먹었을까 궁금했거든. 다행히 문어가 있던 자리엔 사테 꼬치가 꽂혀 있어서 찾기 쉬웠어.
그런데 문어도, 사테도 그대로였어.
'약간 매워서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기름져서 그런 걸까?'
혼자 생각하며 사테 꼬치만 빼서 들고 있던 쓰레기 봉지에 넣었어.
그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어.
"영어 하세요?"
"아니요, 조금만 해요."
"나 혼자인데,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요?"
"그럼요, 저기 서보세요."
찰칵! 찰칵! 찰칵!
그는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혼자 여행 온 사람이었어. 프리다이빙을 좋아해서 매일 이곳에 와서 프리다이빙을 한다고 했어.
나중에 모로코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어. 에어비앤비를 몇 개 운영하고 있어서 숙소 걱정하지 말고 놀러 오라고, 꼭 연락하라고 강조했어.
그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며 인스타그램도 교환했어.
해변을 걷다가 좀 큰 소라 비슷한 걸 발견했어.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삶아서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
역시 난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아. ㅋㅋㅋ
근처 바닷물이 고여 있는 작은 웅덩이에는 산호도 보였어. 뭔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산고가 모래 같은 걸 뱉고 있었어.
똥인가? 잘 모르겠다.
조금 걷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내가 발견한 소라 비슷한 걸 줍고 계셨어. 궁금해서 물었어.
"이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네, 맛있어요."
"그래요? 저기 엄청 큰 게 있는데 이리 오시겠어요?"
"고마워요."
그렇게 큰 소라 하나를 알려드리고 고개를 돌리니, 부드러운 모래 위에 고인 물가에서 귀엽게 노는 어린아이가 보였어.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카메라를 들었더니... 엎드려 있던 아이가 순식간에 앉아 포즈를 취했어.
엎드려 노는 모습을 찍으려던 내 계획은 무산됐지만, 너무 눈치 빠른 소녀였어. ㅋㅋㅋㅋㅋ
소녀를 찍으니 소녀가 동생도 불렀고, 동생도 와서 같이 포즈를 취했어. 마지막엔 한국인의 상징, 손하트를 그리며 귀엽게 마무리했어.
아이들은 정말 천사야.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 부모님이 어디에 계신지 물었더니, 아까 큰 소라를 알려줬던 그 아주머니였어.
나는 아주머니께 가서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었고, 보내드리고 싶다"라고 말씀드렸어. 인스타그램을 교환했고, 사진을 보내드리기로 약속했어.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어.
노을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어.
그렇게 해변의 저녁 시간을 만끽하다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어.
걸어 나오던 길에 커다란 달팽이를 발견했어. 인도네시아 달팽이는 프랑스의 에스까르고와 닮았는데, 보고 있으니 에스까르고 맛이 떠올랐어.
아마도 배가 고파서 그런가, 맛있어 보였어. 또 먹을 생각이네. ㅋㅋㅋ
해변으로 들어왔던 길을 한참 걸어 나오는데, 지는 해를 보려고 온 커플들이 많았어. 썸 타는 남녀도, 진한 커플도 모두 보기 좋았어.
그런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어.
그런데 이 해변은 휴대폰 신호가 터지지 않아 이동 수단을 부를 수가 없었어. 이렇게 되면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다행히 주변에 고젝 오토바이를 타고 온 사람이 있었어.
나와 동행중인 W가 기사님께 상황을 설명하며, 우리 둘 다 오토바이를 탈 수 있냐고 물었어. 착한 기사님은 흔쾌히 괜찮다고 하셨어.
그렇게 되면 작은 스쿠터에 기사님 포함 성인 세 명이 타야 했어.
어쩔 수 없었지. 내가 남자라서 가장 위험한 맨 뒤에 앉았어.
오토바이를 타고 10분 넘게 달려 큰길로 나왔어. 큰 편의점 앞에서 내렸는데, 돈은 받지 않으셨어.
발리 사람들의 친절함이 진하게 느껴졌어.
W랑 나는 편의점 앞에서 서로 "고생했다"라고 격려를 나눴어. W가 자리 잡는 동안, 나는 맥주 두 캔과 YAVA 그레놀라를 사서 밖으로 나왔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어서 근처 수도가에서 아저씨처럼 목과 팔을 툭툭 씻었어. 그리고 물기 묻은 채 맥주를 따서 반 캔을 벌컥벌컥 마셨어.
온몸에 퍼지는 짜릿한 시원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
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불이 켜진 편의점 한쪽 벽에는 벌레들이 모여들었고, 벽을 타고 도마뱀이 사냥을 시작했어.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도시에서 잊고 지냈던 무언가가 느껴졌어.
이 모든 풍경과 순간들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일지 몰라도 나에겐 특별하고 행복 가득한 하루였어.
오늘은 현지의 소박한 일상과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었어.
이 작은 순간들이 모여 삶을 채운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지.
별생각 없이 간 발리였는데...
이제 그리워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