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정독도서관, EG님과의 짧은 인연
내 취미들...
나는 사진 찍는 게 취미다. 그리고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가끔은 책도 읽고, 술도 마신다.
책은 주로 소설.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속 인물들의 삶을 내가 잠깐 빌려 사는 느낌이 든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그 사람이 된 것 같고, 그런 게 좋다. 직접 다 해보지 못하는 많은 일들, 그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술은 아무거나 마시진 않는다. 대충 만든 소주나 맥주는 왠지 내 입에 안 맞다. 향도, 맛도 마음이 안 간다. 차라리 안주랑 잘 어울리는 술을 골라 마시는 게 더 좋다. 그게 분위기도, 기분도 훨씬 더 좋더라.
산책은 음... 그냥 좋다.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진다. 스트레스가 풀린다기보단, 좋은 기운이 채워지는 느낌.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기분이 다르다.
걸으면서 보는 창문 밖 세상이 좋다. 사계절이 조금씩 바뀌는 모습들, 햇빛, 바람, 날씨, 그리고 내가 몰랐던 길, 처음 보는 골목, 조용한 가게들...
봄, 여름이면 나무랑 꽃들도 아름답다. 산책을 하면 이런 것 들 때문에 내 마음과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산책을 하며 사진도 같이 찍는다. 산책하는 그 시간을 담는 게 좋다.
어떤 날은 수십 장, 어떤 날은 한두 장. 결과물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냥, 그 시간을 즐기는 거다.
서울패션위크
코로나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덜 심각해지던 2023년 3월쯤.
처음으로 서울패션위크에 가봤다. 장소는 DDP. 그날도 카메라를 챙겨 나섰다.
사진은 오래 찍어왔지만, 여럿이서 단체로 출사 나가서 하나의 피사체를 둘러싸고 우르르 셔터를 누르는 풍경은 아직도 낯설다. 내 성향이랑 맞지도 않고, 그래서 그런 자리는 잘 안 가는 편.
서울패션위크 현장엔 “나 좀 찍어주세요” 하고 말하는 듯한, 예쁘고 멋지게 꾸민 사람들이 많았다.
런웨이엔 진짜 모델들이 나오고, 그 외의 장소엔 모델 지망생, 연기 지망생,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은 진짜 모델분도 계셨고.
여러 작가님들이 몰려가서 촬영하면 나는 잠깐 뒤로 빠진다. 그리고 다른 피사체로 옮겨가면 그때 내가 다시 다가간다. 혹은 행사장 주변을 거닐다가 지나던 멋진 일반 분들을 촬영하곤 했다.
그렇게 몇몇 분들에게 다가가 사진 촬영 허락을 구하고 촬영을 했다. 그중 한 분, 눈빛이 참 인상 깊었다.
강렬하고도 매력적인 시선.
카메라 너머로 마주한 그 눈빛이 왠지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찍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날은 필름 카메라만 들고나갔던 날이라 촬영한 사진은 나중에 인스타그램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며칠 뒤,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한 결과물을 정리해서 전달드렸다.
그중 그분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곧 봄이 오는데, 봄이 오면 봄꽃 배경으로 인물 사진 한 번 더 찍지 않으실래요?”
다행히도,
고맙게도, 흔쾌히 “좋아요”라고 답해주셨다.
정독도서관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모델 EG님(본명을 쓰기엔 애매하여 이니셜로)과 다시 만났다.
장소는 정독도서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오늘의 촬영 콘셉트, 대략적인 진행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약간 어색할 줄 알았는데, 조금은 긴장되었지만 생각보다 편했다.
사실, 이렇게 누군가를 위한 인물 촬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EG님은 몇 차례 스냅 촬영 경험이 있으셨다.
전공은 소프트웨어 공학이라고 하셨는데, 그 눈빛을 보고 있자니 왠지 이쪽 일을 계속하게 되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한 아마추어 느낌이 아니었다.
이날은 벚꽃이 만개하기 직전이었고, 날씨도 참 화창했다.
꽃도 아름다웠고, 모델님도, 의상도 모든 게 찰떡궁합처럼 잘 어울렸다. 촬영을 위한 모든 게 완벽했다.
이제 남은 건,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
그 생각에 괜히 약간 간장 아니 긴장되었다.
아래 사진은 정독도서관에서 촬영한 그날의 첫 번째 촬영 포인트다.
신기하게도, 촬영을 하면 늘 초반 몇 컷에서 가장 좋은 사진이 나올 때가 많다. 몸도 마음도 덜 풀린 그 순간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긴장감이 묻어나서 그런 걸까.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첫 포인트에서 찍은 이 사진들이 전체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겐 이 장소, 이 순간, 이 감정이 그날의 하이라이트였다. 특히 아래 사진 3장 중, 두 번째 컷이 단연 베스트 샷. 지금 다시 봐도, 잘 찍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니 살짝 민망하다.)
어설픈 떨림과, 따뜻했던 호흡
촬영을 할 때면 내가 그리고 싶은 분위기나 자세를 모델과 이야기 나누며 맞춰간다.
서로 감이 안 잡히면 내가 직접 포즈를 취해 보이기도 하고, 몸의 방향이나 자세를 바로 잡아주기도 한다.
모델마다 다 다르다.
콘셉트 시안만 보여줘도 그 이상을 표현해 내는 분이 있는가 하면,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감을 잡아가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내가 직접 몸으로 보여주고 설명해야 감을 잡는 경우도 있다.
이게 더 낫다, 저게 더 좋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고, 이해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표정으로, 또 누군가는 몸짓으로 더 잘 알아듣는다.
같이 촬영했던 EG님은 그런 점에서 참 편했다. 대충 이런 느낌이라고만 말해도 자세를 척척 잘 잡았고, 눈빛이며 손끝이며... 표현이 정말 좋았다.
오히려 다양한 포즈나 연출을 제안해주기도 했고, 초보인 나를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처음이란 게, 늘 좀 서툴기 마련인데 그런 게 고마웠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내가 리드하며 촬영을 이어간다. 이젠 조금 익숙해졌달까. 자만하는 건 아니지만 낯선 사람과의 소통이 더 자연스러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랬던 첫 촬영이라 그런지, 그 어설픈 떨림과, 따뜻했던 호흡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어떻게 끝내지?
나는 글쟁이가 아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글을 쓰다 보면 처음에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자꾸 잊어버린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어버리니까 또 이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민이다. 이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하지?
지인 중에 브런치스토리 스승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이 내게 아주 좋은 팁을 하나 알려주셨다.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글을 써라."는 팁이었는데 이게 나에게는 너무 좋은 팁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땐 신나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 팁을 듣고부터는, 말하듯 쓰는 글이 편해졌다. 잘 쓴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생각을 거침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는) 하지만 글의 마무리가 어려운 것 같다.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어떻게든 끝내 보기로 한다.
아무튼
EG님과의 작업은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직 학생이셨고, 서로의 일정이 잘 맞지 않아서 그랬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언젠가 또다시, 인연이 된다면 한 번쯤은 다시 함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은 그날 정독도서관에서 촬영한 EG님의 사진을 몇 장 덧붙이겠다.
그 순간들이 사진을 통해 조금이나마 전해지기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마쳐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