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현구 YPER 대표 Aug 25. 2019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

사태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한 논리

사업하느라 절필한 사람도 다시 글을 쓰게 할 정도로 시국이 시끄럽다.

젊은이들이나 자신이 진보라 여기는 사람들의 혼란도 페북에서 많이 느껴지고...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해 예전에 깨달은 부분이 있어, 오랜만에 생각을 나눠보기로 했다.


엉뚱하지만 젊은 캐나다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형제도 폐지론이 그 시작이다.


예전에 영어회화 학원을 다닐 때 사형제도를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20대 후반의 캐나다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살려 둘 가치가 없는 극악한 사람들은 사회적 비용을 생각할 때 사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전형적인 좌파의 사고방식을 가졌지만 사형제도에 대해서 만큼은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보수적인 접근을 취한 거다. 사회에 더 이상 살려 둘 가치도 없고 평생 감옥에 있어 봤자 우리의 세금만 축낼 뿐인 사람들을 살려 놓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물론 기본 전제는 절대로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정확해야 하고 집행도 신중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내 결론은 사형제도 폐지론이 사치스러운 인도주의로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젊은 캐나다 선생님의 사형제도 폐지 옹호론이 나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의 주장은 이랬다.

"사형제도 폐지론은 사형수를 위한 인도주의가 아닙니다. 사형제도란 살인을 정당화 함으로써 우리 아이들의 머릿속에 '경우에 따라 사람을 죽여도 된다'라는 관념을 만듭니다. 이건 교육적으로 좋지 않고 결과적으로 사회를 위해서 좋지 않습니다."


그의 사형제도 폐지론은 진정으로 우리 사회를 위한 이상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자 빅픽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당시 좌파였던 나의 성향과 취향에 너무 잘 맞았기에 나보다 10년은 어린 선생님의 가르침을 아직까지 마음에 새기고 있다.


영어회화 수업 이전의 내 생각이 틀렸고, 캐나다 선생님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게 핵심이 아니다. 나의 사상적 정체성에 딱 맞는 논리를 찾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의식의 전환을 경험하며 내가 깨달은 것은, 진보와 보수 성향에 따라 각자에 맞는 정책과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각자의 입장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진보와 보수는 기득권이 있냐 없냐 이전에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기질에서 기인한다. 고전이 된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슨은 동물의 유전자에 '매파'와 '비둘기파'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매파는 최대한 가까운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효율적이고 단기적인 정책과 승자독식의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다. 정치로 치자면 '우파'에 속한다. 비둘기파는 보다 넓은 범위의 유전자 생존을 추구하여 약간의 손해를 감내하며 평화적인 해결을 추구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당장의 증오를 묻어 두고 많은 비용을 들여 가며 사랑하고 인내하는 쪽인가? 아니면 악당은 즉시 응징해야 하고, 현실과 효율성에 집중하며 단기적인 성과로 사회를 탄탄하게 만들자는 주의인가?

당신의 유전적 성향에 따라 하나를 선택해 보자.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선택해 보자.

당신은 기득권이 있는 사람인가, 기득권이 없는 사람인가?

즉, 이 사회가 변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적 혜택을 누리는 '있는 집 자식' 또는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흙수저 인가?


두 가지 질문에 대답했다면 당신은 아래 네 가지 부류 중 하나일 것이다.

1. 매파이면서 기득권이 있는 자.

2. 매파이면서 기득권이 없는 자.

3. 비둘기파이면서 기득권이 있는 자.

4. 비둘기파이면서 기득권이 없는 자.


1과 4는 각각 전형적인 우파와 좌파이다. 그리고 제정신을 가졌다면 당연히 각각 보수당 또는 진보당을 지지해야 한다.

2는 더 노력해서 기득권을 갖고 우파가 되는 게 좋다. 그렇게 못하겠으면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가 세상을 이끌어가야 하는 논리의 우파보다는 좌파의 편에 서길 권한다.

3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기득권보다는 장기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며 보다 현실적으로 세상을 잘 살게 하는 길로 갈 것인지...


조국 사태를 말한다면서 엉뚱한 이야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언론과 정치인들이다.


국가가 생긴 이후로 정치는 항상 두 개의 파벌이 경쟁해 왔다. 그 파벌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매파와 비둘기파로 구분되기에 그 덩어리들을 분명하게 가르는 정치적 쟁점이 크게 둘로 나뉜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직적 움직임이 정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조국을 둘러싼 정치적인 논쟁은 양당의 세력 다툼이 핵심이지 조국 일가족의 비리가 아니다. 백성, 민중, 국민은 항상 정치 세력들이 추구하는 목표보다 정치가들이 정쟁에 사용하는 비본질적 사안에 휘둘린다.

그것을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앞서 말한 자신이 정치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진영 논리를 말하고 있다. 진영논리는 정치가들이 서로를 비판할 때 쓰는 주제이지만 정치야 말로 총이 없는 진영들의 전쟁이라는 걸 부인해선 안된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부류인지 확실히 했다면, 비 본질적인 이슈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의 진영을 위해 행동하는 게 옳다.


그렇다면 좌파는 조국의 비리를 눈 감아 줘야 한다는 말인가?

아군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눈감아 주는 것만이 우리 편에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군을 군법에 회부하는 것과 적과 함께 총을 들고 잡으러 다니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금 상황에서 기득권 있는 매파적 성향의 사람들이 태극기 집회를 나가고 인터넷에 각종 비난으로 도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정확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진영이 조국의 비리를 운운하는 감정적 행동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법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옛날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에서 새벽시간 행인 없는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 '양심 냉장고'를 선물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행인이 없는 길에서 신호등이 빨간불로 차를 세우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신호등이 교통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빨간불에 일시정지 후 다시 출발하는 사람은 법을 어겼으니 비난받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들의 행동은 나쁘게 말하면 편법, 좋게 말하면 융통성이다.


사업을 해 보니 법이라는 것이 정의를 정확하게 알고리즘화하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됐다. 특히 나처럼 밑바닥부터 사업을 시작해 맨몸으로 싸우는 사람일수록 법을 모두 지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라 완벽하게 지키기엔 법이 너무 허술하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한치의 티끌도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면 "그렇게 키워진 사람"만이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즉 "정치를 위한 가문"이 생겨나야 하고 그것은 다시 귀족적 기득권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법을 어겼다면 그 벌을 받는 게 당연하나, 기득권을 활용한 편법이 자신의 열등감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감정에 휩쓸려 피아식별 못하고 입총을 난사하는 건 자제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적 비판을 하려면 자신의 정체성부터 확실히 하길 권한다.

그리고 목적 있는 비판과 행동을 해야 한다.

정치에 있어서 만큼은 각종 비리나 성 스캔들, 사형제 지지와 옹호, 유신과 무신, 반공과 반일, 동성애 찬반 등이 각자의 진영을 위한 전쟁의 무기일 뿐, 많은 사람들이 흥분해서 떠들어야 하는 감정적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내용을 보면 좌파 진영에게 조국을 옹호해 줘야 한다는 뉘앙스가 강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며 나도 태생적 좌파에서 우파적 관점으로 많이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의미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것 같다.


나는 조국을 옹호하기보다,

좌파나 우파 모두 서로의 정체성을 배경으로 건전한 경쟁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장기적으로 자신의 진영을 위해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고 보다 지성적인 대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창업의 시작, 사업모델의 이해 (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