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노엘 Jan 09. 2024

ETHIKA

도덕적 책임에 대하여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 행복이 물질적 풍요에서 오는 안락한 생활과 선택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라는 보편적 기준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마는 물질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지만 그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더 큰 조건이 구비되어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 미덕, 에티카이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처럼 내 몸에 쌓여 배여 나는 것이다 보니 하루아침에 갖추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것을 한두 번 실천하고 변화하려 노력했다고 완전한 내 것이 되지도 않는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일렁이는 물결처럼 인간의 마음은 늘 출렁거린다. 잠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면 어느새 욕구에 지배당하는 것이 인간이다.

때로는 잘못된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할 때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그러다 보니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알고 행했는지 모르고 한 것인지에 따라서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발성과 비자발성이 윤리에서는 중요한 평가요인이 된다.

세상은 넓고 즐길 것은 무궁무진하다. 마음만 먹으면 즐거운 것들을 찾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인간은 쾌락을 더 많이 끌어당겨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고통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내 것이 아니기를 원한다. 그것들을 바라는 마음가짐이 삶의 행동을 결정한다.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고 드러나지 않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있는 그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지나침을 반성하기란 쉽지가 않다. 가장 많이 하는 변명가운데 하나가 모르고 그랬다. 친구가 강요해서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많은 핑계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바로 비자발성의 카드를 내미는 것이다.


고대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의 작품 오레스테이아를 보면 집안이 피의 복수를 부르고 있다. 트로이 전쟁을 치르고 10년 만에 귀향하는 남편 아가멤논을 아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물론 죽임의  명분은 있었다.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바친 죄를 물은 것이다. 당시 힘없고 어렸던 어린 아들 오레스테스는 성인이 되어 복수의 칼을 품고 집으로 향한다. 복수는  아폴론 신의 명령이라고 주장하지만 내면에는  아버지의 성역을 되찾고 싶은 아들의 욕구도 깔려있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철저히 자발적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행동에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천륜을 저버린 아들의 행동은 가문의 저주를 대물림한 행동이었고 선택이었으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그것과 다른 작품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무지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너무나 파괴적인 신탁을 벗어나기 위해 집을 떠났지만 삼거리에서 만난 노인이 아버지일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스핑크스의 문제를 풀고 테바이의 왕권을 얻게 된 그가 함께 살게 된 여인이 어머니일 거라고도 의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신탁의 예언대로 운명의 수레바퀴를 비켜가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른다. 철저한 비자발성 상황이다. 우리는 오이디푸스왕의 잘못을 물어 단죄할 수 있을까.


도덕적 책임은 스스로의 양심에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알고서 행한 것인지 모르고서 행한 것인지.

그리고 무지로 인한 행동이었고 그것이 불의한 것이라면 반드시 반성과 후회가 따라야만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다. 오이디푸스왕은 그 두 가지를 그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자신의 눈을 찌르고 죽을 때까지 테바이를 떠나 망명자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가 만약 그와 같은 인륜을 저버리는 불의한 행동의 주인공이  된다면 과연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 반문해 보게 된다. 대부분 그 고통의 크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피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자살은 고통을 피하는 가장 비겁한 행동이다. 그 무거운 삶의 고통을 온전히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끌어안은 오이디푸스야말로 용기 있는 삶의 본보기가 아닌가 싶다.


핑계가 너무 많은 세상이다. 행동의 제1원리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있음을 생각할 때 그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은 나의 책임이고 자발적 선택이다. 모든 것은 내 탓이지 결코 남의 탓이 될 수가 없다. 순간순간 출렁이는 욕망 속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선택하는 숙고의 삶을 통해 합리적인 선택을 해나가는 미덕을 갖춘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방법이 가장 최선일 것이다. 선도 악도 자발적 결과로 얻어진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