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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란 May 23. 2024

영어교육에 대하여 2탄

말하기보다 듣기, 들려야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았다고요? 샘 영어 잘하시겠네. 한번 해보세요."

이처럼 난감한 요청이 없다. 반복되는 상황에 이제는 나도 요령이 생겨 몇 마디 수려하게 날려주곤 한다.

헬로우, 마이네임이즈 영란. 아임 하이스쿨 매쓰 티처. 아임 프롬 코리아.

이때 f 발음 같은 거 잘 씹어주고 동그랗게 모은 손을 적당히 돌려주며 여유로운 미소 좀 날려주면 오오~~~ 하며 물개박수를 쳐주신다.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하면 자고로 말을 폼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미국생활에서는 말을 잘 못하는 것보다 상대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더 치명적이었다. 묻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서 잘 정돈해 일단 뱉었다고 하자. 정작 심각한 상황은 상대의 친절한 답변을 내가 알아듣지 못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이다. 답이 궁금해 질문을 했는데 상대가 답을 해주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니.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에 이민 가 사는 분들을 만나보면 영어가 부족했던 시절 생긴 나름의 웃픈 에피소드가 한 트럭씩 다. 결혼해서 미국에 간지 일 년 정도 되었던 때, 온 동네에 (물론 영어) 수다쟁이로 소문난 우편공무원 한국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20대 초반 미국에 처음 혼자 오시던 길. 환승을 위해 LA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 햄버거를 사 먹기로 하셨단다. 말 못 하는 외국인으로 어수룩하게 보이다 사기라도 당할까 정신 똑바로 차리자며 영수증을 보았는데. 이런~ 아니나 다를까, 이것들이 내가 주문하지 않은 음식에까지 값을 매긴 것을 발견했다. 물론 쪼르르 직원에게 가서 야무지게 따졌다. 이 분이 비록 영어는 못 하셨을지언정 젊었을 때도 당차고 야무지신 성격이셨을 테다.


" 헤이 헤이. 여기 좀 봐. 내가 햄버거, 콜라, 감자튀김 주문했어.  그런데 이 tax는 주문 안 했어. 이거 돈 왜 받았어?"

직원에 이어 매니저까지 나와 설명에 설명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그저 끝까지 똘똘하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 아저씨.

"몰라 몰라 됐고. 내가 햄버거, 콜라, 감자튀김 주문했지? 여기 tax는 쟁반에 없지? 넌 근데 왜 그 돈을 받았냐고~~"


나에게 영어는 좀 말하냐는 질문 대신 귀는 좀 트였냐고 물으시며 얘기해 주신 에피소드였다. 



어릴 때 외국 한번 나가본 적 없이 서른에 유학 나가 영어 배운 사람치곤 남편은 영어를 꽤 폼나게 구사하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잘하지는 못했다. 미국 학생들도 무서워 떨 정도로 직설적이기로 소문난 지도교수 밑에서 하드 트레이닝을 받아 짧은 시간 동안 많이 성장한 측면이 있다. 처음에는 교수가 '네 말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핀잔을 주어 절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영어 말하기가 부족한 한국학생에게 그 교수가 내린 처방이 '그룹미팅 회의록 쓰기'였다. 알면 알아서, 몰라도 아는 척 일단 떠들고 보는 수다쟁이 미국인들. 대학원생을 비롯하여 스무 명 가까이 되는 그룹의 연구진들이 두세 시간씩 열띠 토의한 내용을 연구의 일부로 세세히 기록해두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남편이 그 자리에서 그걸 다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 회의가 끝나면 떠들어댄 친구들을 찾아가 '아까 너 뭐라고 말했니?' 일일이 물어봐 적어야 했고 그 험난한 작업이 다 끝나면 해가 서산을 넘기곤 했다.


자정 전후에야 실험실에서 돌아오는 게 보통 이공대 대학원생들의 일상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 그룹미팅이 있는 날은 초저녁에 퇴근해 저녁만 겨우 먹고 기절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떡실신으로 누워있던 남편의 짠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남편은 그 후로도 회의록 넘겨줄 또 다른 모지리 후배가 들어올 때까지 몇 년을 더 열심히 묻고 다녔다. 그렇게 똑똑히 알아듣기 위한 수년간의 노력으로 영어실력은 일취월장했다.

그 교수는 말 못 하는 외국학생을 위한 가장 좋은 영어공부법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열심히, 많이, 정확히 들어야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6년을 미국에 살았지만 귀국하기 반년 전쯤에야 안 떨고 햄버거 주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설마 싶겠지만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시키는 것은 사실 한국에서도 너무 떨리는 일이다. 써브웨이 주문을 상상하면 된다. 뒤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있고, 내 차례가 되면 빠른 속도로 내 일행이 원하는 메뉴들을 설명해야 한다. 시간의 압박감 속에서 유난히 물어보는 것도 많고 옵션도 많은 미국의 패스트푸드점. 특히나 흑인 점원이라도 만나면 발음도 잘 들리지 않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기는 또 얼마나 심한지. 어쨌거나 거의 마지막 오 육 년 차쯤 되어서야 비로소 영어를 말하는데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니 미국땅에 산 시간에 비해 영어실력은 그리 빨리 혹은 크게 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첫 5년은 셋째를 출산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정신없이 보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영어공부를 시켜야겠다 마음먹고 5년간 엄마표 영어를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하루 한 시간 자막 없이 유아용 애니메이션 보기, 그리고 그림이 대부분인 그림책 읽어주기 삼십 분 정도였다.


2019년, 남편이 미국으로  년간의 방문연구를 가게 되었다. 영어 못하는 열등감 투성이 동양 여자로 살기 싫어 미련 없이 떠나온 그 미국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왠지 살짝 설레는 이 마음은 뭐지? 자격지심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통로가 언어뿐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생으로 배운 40대가 되었기 때문일까?


아이들과 극장에서 디즈니 만화를 보았는데 거의 다 들렸다. 10년 전에 미국에 살 때는 '나는 반에 반만 알아들으니 나한테는 티켓값을 25%만 받아야 한다'고 극장에 갈 때마다 얘기하곤 하던 나였는데 말이다. 그날은 티켓값의 10%만큼만 아까웠다.


단순히 듣기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말을 알아들으니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로 인해 대응이 아닌 호응을 하고 있었다. 대단히 수준 높은 문장은 아니었으나 차분하고 명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내 모습에 나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의사전달을 위한 영작실력은 중학교 1학년 수준으로 충분했다. 정확히는 뽀로로 영어판 수준이었다. 뽀로로와 그 친구들만큼이나 나도 막힘없이 내 의사를 표현하고, 문제상황을 설명하고, 때로는 미국인과 티키타카를 하고 있었다. 

conversation은 주거니와 받거니가 있는 쌍방향 행위이다. 들려야 할 수 있고 들려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대화이다.



귀가 트이려면 많이 들어야 하고 많이 들으려면 노출이 많아야 한다. 노출을 많이 하려면 영어권나라에 나가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어학연수도 가고 교환학생도 간다. 그러나 본인이 어떻게 환경을 만드냐에 따라 미국에 살아도 영어노출이 적을 수 있고 한국에 살아도 영어노출이 많을 수 있다. 미국에 살 때보다 한국에서 영어가 더 많이 늘었던 나의 경우가 그 증거이다. 물론 본인이 학습의지를 가지고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성인과 달리 아이들을 영어에 노출시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엄마는 뱀 같은, 여우 같은 전략가여야 한다.


한국 나이로 8, 6, 4세이던 해부터 약 5년간 진행한 영어 듣기는 세 아이 각각의 나이와 상황에 따라 다른 효과를 가져왔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몇 세까지는 듣게 하고 몇 세에는 책을 읽히고 몇 세에는 외국에 나가 일이 년 학교를 다니고, 이런 식으로 공식화하기에는 언어를 습득하는 방법이 아이의 성향이나 여러 현실적 한계에 의해 달라져야 하는 부분도 있다. 한 가정이 2년을 미국에서 살다 왔는데 큰 아이에게는 국어와 어를 모두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최적의 시간이 되었더라도 작은 아이에게는 두 언어 모두 이도저도 아니게 만들어버린 최악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 집에서 영어 듣기가 제일 잘 되는 조슈아의 사례에서 나는 듣기 노출의 적기를 조심스럽게 제안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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