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이별>

이별은 사라짐이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시간이다.

by 양수경
For Miran — my London friend of twenty years



이별은 언제나 조금 일찍 온다.

사람이 떠나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작별의 연습을 시작한다.


이별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함께한 순간들이

천천히 익어가는 과정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이별은 슬픔만이 아니라,

익어가는 시간의 한 형태다.

서로의 마음속에 남을

가장 따뜻한 온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별은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 안에 남긴 온기와,

내가 그녀에게 건넨 시간의 무게가

결국은 나 자신을 깨어나게 했다.

그 만남이, 그 이별이,

내 삶의 가장 고귀한 순간들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스무 해 동안, 우리는 함께였다.

차 한 잔을 나누며 웃던 오후,

비가 내리던 런던의 골목길,

식탁 위에 놓인 접시와

그 사이로 오가던 따뜻한 말들.


그녀는 내 일상 속에 스며 있던 사람이었다.

힘들고 지친 날이면

말없이 내 손을 잡아주던 사람,


그 손끝의 온도 속에서

나는 ‘괜찮다’는 말을 듣곤 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다.

그리움이 아픔을 데리고 오지만,

그 아픔 속에 또다시 따뜻함이 숨어 있다.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

이 도시의 하늘과 거리 곳곳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그녀의 목소리를 되새기고

그 웃음의 결, 손짓, 걸음걸이 하나까지

조용히 마음속에서 다시 불러본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잊지 못하는 마음이 서로 엉켜,

기억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함께 걷는 거리의 나무,

늘 앉던 카페의 의자,

그 모든 것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이제는 다른 빛으로 보인다.




나는 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건

단지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이

더 이상 내 앞에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천천히, 그러나 피할 수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별은 슬픔만이 아니라,

익어가는 시간의 한 형태다.

서로의 마음속에 남을

가장 따뜻한 온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녀가 멀리 있어도,

그리움은 여전히 내 안에서

다른 빛으로 자라난다.


바람이 불면,

그녀와 함께 걷던 골목의 냄새가 돌아오고,

햇살이 기울면,

그녀의 웃음이 내 하루에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이별은 사라짐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계속 이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멀리 있어도

우리의 시간은 여전히

익어가고 있다.





[작가의 말]


미란은 런던에서 스무 해 동안 내 곁에

있었던 친구다.

함께 웃고, 함께 걸으며,

내 인생의 계절을 나란히 지나온 사람.


이제 그녀는 독일로 향하지만,

그리움은 서로의 마음속에서

천천히 익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