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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Oct 22. 2021

제주의 봄날_벚꽃에서 메밀꽃까지

'제주 1년 살이' 다섯 번째 이야기



제주의 봄날


'제주의 사계절 마음껏 즐기기'. 올해 나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더 이상 꽃이 피고 지는지도, 계절이 왔다 가는지도 모른 채 허둥지둥 살고 싶지 않았다. 1년살이를 하고 싶었던 이유도 계절마다 다른 제주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3월엔 벚꽃과 유채꽃, 4월엔 청보리, 5월엔 메밀꽃, 6월엔 수국, 8월엔 배롱나무꽃, 10월엔 억새와 핑크 뮬리, 12월의 동백까지, 제주에서는 계절마다 보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들이 가득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했지만, 계절마다 꽃놀이를 즐기려면 무엇보다 부지런함은 필수다. 꽃이 피고 지는 건 다 때가 있고, 어영부영하다가는 시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꽃놀이의 핵심은 타이밍! 그래서 나는 제주에 내려가기 전부터 연간 꽃놀이 계획을 세워두고, 얼른 봄이 오길 기다렸다.  




시작은 벚꽃


제주에 내려온 이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봄은 매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봄비가 흠뻑 내린 3월의 어느 주말,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도, 어린이집 등 하원길인 평화로에도, 눈길 닿는 모든 곳에서 벚꽃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껏 제주 여행은 꽤 자주 왔지만, 벚꽃이 피는 시기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 벚나무가 이렇게 많은지, 또 이렇게 아름다운 지도 처음 알았다. 벚꽃이 만개하자, 섬 전체가 온통 핑크빛으로 넘실댔다.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제주의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반했다.


하지만 '짧고 굵은' 벚꽃시즌의 특성상,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음 주말에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예보가 나오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입도한 이후로 제일 놀란 게 엄청난 바람인데, 아무래도 하늘하늘 가녀린 꽃잎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딱 일주일만큼은 열일 제치고, 제주에서 벚꽃으로 유명하다는 곳들을 부지런히 다녔다. 제주대 벚꽃길 드라이브는 물론, 전농로 벚꽃길도 산책했다.


가본 곳 모두 아름다웠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제주 종합경기장의 벚꽃 숲이었다. 이곳은 벚꽃길, 즉 가로수길과는 다르게 벚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인데,  안에는 특이하게도 게이트볼 연습장이 있었다. 그래서 알록달록한 운동복을 입고 게이트볼에 열중하는 동네 어르신들 사이로 산책을 하는 묘미가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는 여기가 맞나 싶어서 어리둥절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조용해지고, 숲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차도, 사람도 북적거리는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특히 좋았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서 혼자 산책하고 싶다. 물론 벚꽃이 피는 계절에.  


제주 종합경기장 근처의 벚나무숲

 



청보리는 가파도


4월은 청보리의 계절이다. 마침 4월 중순에 친구들과 제주 여행 스케줄이 잡혀 있었고, 나는 '4월엔 청보리!'청보리는 가파도!'를 외치면서 여행 일정에 가파도를 슬쩍 집어넣었다. 가파도에 가기로 한 당일, 비 예보와는 달리 날씨가 맑아서 출발하기 전부터 느낌이 좋았다.


청보리 시즌이다 보니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서 섬에 머무는 내내 엄청 붐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친구들과의 여행 컨셉이 '느긋하게'로 바뀐 만큼, 우리는 그냥 걷고 싶은 만큼 걷고, 쉬고 싶을 때 쉬기로 했다. 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바다는 반짝반짝 빛나고, 친구들과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다.


한참 바닷길을 따라 걷다가 청보리밭을 보기 위해서 소망 전망대 가는 길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청보리밭의 풍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보송보송한 초록빛 청보리들이 바람에 따라 파도치듯 흔들리는 모습은 정말 멋졌다.


쉴 새 없이 일렁거리는 청보리 물결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조그맣고 까만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멍하게 바라보다 보면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깨끗하게 청소되는 시원한 느낌이랄까. 암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환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들과도 잠시 떨어져서 혼자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을 마음에 가득 담았다.  


그렇게 가파도는 나에게 청보리밭 풍경으로 각인됐다. 그리고 얼마 전, 나는 올레길을 걷기 위해서 6개월 만에 다시 가파도를 찾았다. 10월이지만, 한낮에는 여름인 듯 더웠다. 가파도 올레길은 올레길 전체 코스 통틀어 길이도 제일 짧고, 걷기도 수월한 편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도 꽤 걸리고, 날씨까지 더워서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엔 더 이상 청보리밭이 없었다. 가을의 가파도도 조용하고,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압도적인 풍경을 보여줬던 청보리밭이 그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언젠가 가파도에 또다시 오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청보리밭 때문이리라.


4월의 가파도 청보리밭




메밀꽃 필 무렵


5월이 되자, 제주 곳곳에서 메밀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계절엔 제주 어디서든 메밀밭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한가득 피어있는 메밀꽃을 보고 싶어서 와흘에 있는 메밀 마을을 찾았다. 바닥에 돌멩이가 많아서 걷기 불편한데도 꼬마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잘 돌아다녔다.


메밀꽃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크기는 조그맣고, 모양은 평범하고, 색감도 화려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그 자잘한 꽃들이 한데 모여 있으면 하나의 큰 덩어리로 인식된다. 그래서 소박한 본래의 모습을 뛰어넘어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숨 막히게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메밀 마을에서 만난 풍경은 하얀 메밀꽃밭과 꽃밭 곳곳에 서 있는 나무들, 그리고 그 뒤를 받쳐주는 한라산까지 어우러져서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주말 치고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메밀밭에는 이 계절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졌다. 예쁜 원피스 입고 사진 찍으러 온 사람들, 웨딩 스냅 촬영하러 온 예비부부들도 두 팀이나 만났다.


 마을에서는 메밀꽃 피는 시즌 주말 동안, 마을 주민분들이 운영하는 팝업 식당도 열린다. 메밀로 만든 각종 주전부리, 또띠아, 핫도그, 와플 등등 종류별로 사다가 아이들과 정자에 앉아서 맛있게 먹었다. 마을 주민분들이 직접 만들어서 판매하는 음식들이어서 더 건강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끊임없이 펼쳐진 하얀 메밀밭을 바라보며 맛있는 메밀음식을 먹고 있자니 이곳이 천국, 이 맛이 행복이 아닌가 싶다.


5월, 와흘 메밀 마을의 메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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