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무렵, 잠시 볼 일이 있어 코엑스에 들렀다가 우연히 근처 로펌에서 일하는 동기 변호사를 만났다. 그는 대학 선배이자 사법연수원을 함께 다닌, 예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변호사였다. 어느새 그는 자신이 처음 들어갔던 로펌의 대표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서로의 안부를 나누던 중, 그로부터 얼마 전 그 로펌 소속 변호사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검사 출신으로 나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비교적 건강했던 사람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선배는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너도)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 인생 짧아..."
그 말이 돌아오는 길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말, 누구나 꿈꾸는 삶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일까? 걱정거리가 없는 삶? 아니면 매일매일이 즐겁고 특별한 삶? 두서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쉽게 답을 찾기 어려웠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그런 삶을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질문은 있지만 답이 없는 막막함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내가 괜찮은 조건 속에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남부러울 것 없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것은 행복이란 외적인 조건만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의 조건이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주관적인 감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권력이나 부가 행복을 보장한다면, 대통령이나 재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장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더 잘 사는 선진국 사람들보다 더 높은 행복지수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삶의 조건은 행복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나는 언제 가장 행복했고 즐거웠던가?’ 곰곰이 떠올려보았지만, 선뜻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이런,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헛산 걸까?’ 허탈한 마음으로, 퇴근 후 평소 걷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가볍고 소소하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 벚꽃 향기와 봄꽃의 내음이 실려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가 양편으로 활짝 핀 벚꽃을 바라보며, 문득 무거운 생각들이 지워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바로 이게 행복이라는 것을.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말했듯이 어느덧 아름답고 다정한 봄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봄이 왔다. 애타게 기다리게 하거나 속이는 일 없이,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모두 다 즐거워하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고 다정한 봄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일상 속 순간순간들 속에 있었다.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향기로운 꽃내음이 실려오는 부드러운 봄바람을 들이마시며, 두 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것. 내가 살아 있음을 온전히 체감하는 순간, 그게 바로 행복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자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보다 삶의 조건이 덜 갖춰졌더라도, 뭔가 부족하고 결핍이 있더라도, 주어진 순간들을 기꺼이 누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행복하다.
결국 행복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태도이고 감각이다.
지금까지 행복한 적이 없었고 즐거운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면, 좋았던 기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 순간들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지나쳐 버렸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보다, 지금 내게 있는 것들부터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진다. 그것은 삶이 주는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에서 시작된다. 그 여백 안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깨닫는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피어나는 벚꽃처럼,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