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햇빛을 다시 보았습니다

by 서영수

며칠 전, 평소와 달리 햇볕이 따뜻하게 비치던 오후였습니다. 햇빛 아래에만 서 있으면 3월 초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봄기운이 완연했습니다.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습니다. 코엑스 몰로 들어가는 입구, 하늘이 열린 공간에서 한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편안하고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맑은 하늘이 보였습니다. 저도 잠시 곁에 앉아 같은 하늘 아래서 햇볕을 쬐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이런 것이 행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햇빛이 무엇이기에 이런 생각까지 들게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춥고 흐린 날이 많았습니다. 회색빛 하늘에 미세먼지까지 겹쳐 밝은 햇빛을 보는 날이 드물었습니다. 겨울이니 당연하다고 여기며 지나쳤습니다. 어쩌면 맑은 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자연은 언제나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그 비밀을 슬며시 보여주는 법이니까요.




그 노인을 바라보다가, 언젠가 읽었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안드레이 공작이 의식을 되찾아 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 순간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어째서 지금까지 이 높은 하늘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제라도 겨우 이것을 알게 되었으니 정말 행복하다. 이 끝없는 하늘 외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모든 것이 기만이다."


귀족으로서 부와 명예를 이미 가졌던 그는 더 큰 공을 세우고자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었습니다. 그동안 전부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햇볕을 쬐고 있던 이름 모를 노인을 보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그 역시 지난 시절에는 다른 무엇을 좇으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비로소 자신에게 내려오는 한줄기 햇빛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요.


그 생각에 이르자, 오늘의 햇빛이 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흔하다고 여겼던 빛이 더 이상 흔하지 않았습니다. 삶에서 소중한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순간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름다움은 이런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음속에 남는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느냐고 묻자 "조금만 비켜주시오. 햇볕을 가리지 않게."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권력을 손에 쥔 왕 앞에서도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한줄기 햇빛이었습니다. 아마 그는 일찍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 권력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체감해야만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박함이 있어야 현재가 또렷해지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살면, 매 순간순간이 중요해진다"는 최인철 교수의 말처럼, ‘여기, 지금’은 젊은 날에는 머리로 이해하는 문장이지만, 세월을 통과한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삶이 됩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잃고, 시간을 잃고, 장소를 잃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은 다시 불러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이 공작은 적장인 나폴레옹을 눈앞에 두고도, 그가 그토록 숭배했던 영웅의 위대함이 하늘 앞에서는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붙들고 있던 위대함과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보다 더 크고 공평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겨울은 지나갔고,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었습니다. 지나가버린 것,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게 내려온 햇빛을 함부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삶에 대한 태도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춥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한줄기 햇빛을, 저는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제 작은 선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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