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Jul 14. 2023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ㅡ 허연

어떤 책은 읽으면 오래 기억되는 반면, 어떤 책은 읽고 나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진다. 가볍게 읽은 단편, 특히 스토리가 평범한 소설이 그렇다. 문장이 아름답거나 줄거리가 특이하다면 뭔가 기억에 남았을 거다.


반면에 장편소설은 기억에 오래 남는 편이다. 장편이다 보니 긴 시간 읽어야 하고, 줄거리나 서사 또한 스케일도 커서 기억할 부분도 많다. 대개 장편소설은 서양 고전이 많은데, 번역도 생소하고 문장 또한 낯설다. 작가의 역량에 따라 어려운 철학이나 심리학적 소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거기다가 그 시대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다면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 


책을 읽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이나 사조까지 꿰뚫고 있어야 하니 읽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책 속에서 헤매는 시간만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에 비례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오래 만난 사이일수록 그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건 당연하다. 드라마틱한 일들이 많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우리 관계 역시 소설을 많이 닮았다. 그 사람과 긴 장편을 썼다면 함께 한 시간들을 오래 기억할 것이고, 짧은 단편에 그쳤다면 벌써 그 시간들이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장편이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함께 했던 추억들을 속속들이 기억하기 어렵다. 세월이 사람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기억을 일부러 지우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특히 실연(失戀) 또는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면 하루라도 빨리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진다. 이별은 원망과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두고두고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죄책감까지 더해지면 헤어졌지만 헤어진 게 아닌 상태가 한동안 계속된다. 마음에서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고, 지우려고 노력하는 만큼 더 기억은 생생해지고. 이 모순 앞에서 점점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살기 위해서 지난 시절의 기억을 지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힘들어서 살 수 없었을 테니까. 기억한다고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아물 것 같지 않은, 가슴에 큰 흉터를 남긴 상처도 잊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어느 순간 기억에서 희미해진다.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망각은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할 때도 노력해야 하지만, 그 이후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요즘은 이 노력이 점점 힘에 부친다. 가슴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슬픔의 앙금 같은 것을 휘저어 다시 떠올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허연 시인도 이 시를 쓰면서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허연 _ 오십 미터>



매거진의 이전글 눈빛이 풍경을 인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