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예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Nov 20. 2023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좋을까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Lesende Reader>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일단 마음이 편안해진다. 선명하지 않은 그러나 은은하게 풍겨 나는 빛과 그림자와 실루엣이 뭔가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선명하고 강하게, 뚜렷하게 뭔가를 남기거나 남기고 싶은 사람들이 볼 때는 이 그림이 썩 탐탁지 않을 수 있다. 나도 한때는 선명한 것을 선호했고 무엇보다 내 삶이 좀 더 선명해지기를 원했던 적이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흐릿한 것을 못 견뎌했다. 그러나 선명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


언젠가 너무 선명하게 보이면 오히려 눈에 해로울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라식 수술을 받아 갑자기 세상이 선명하게 보이면 안경을 낄 때와 다르게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면서 눈을 혹사하게 된다는 것, 좋아진 시력이 시력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어느덧 나이 탓인지 몇 년 전부터 책이나 서류를 읽기 위한 용도로 근거리 도수의 안경을 쓰고 있다. 하루 중의 대부분을 무언가를 읽고 쓰는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가까운 곳 말고는 대부분의 풍경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쁘지 않았다. 보이는 시야의 제약으로 무언가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Gehard Richter ㅡ Lesende Reader, 1994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은 단정한 자태, 무표정한 모습으로 신문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차분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 따스한 빛이 여인 뒤에서 머리와 목덜미를 감싸고 있다.

선명하지 않아 오히려 무언가를 읽고 있는 그녀가 더 도드라진다. 화가가 인물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으면 오히려 주목받지 못했을 것 같다. 그건 사진과 다를 바 없고 실물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은 어디서나 누구나 볼 수 있는 우리의 현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니까. 표정이나 태도로 무언(無言)의 말을 하고 있는, 이 그림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이미 완성된 그림 위에 두꺼운 붓질을 더함으로써 형체를 모호하게 하고 무언가 지워진 듯한 효과를 주려고 했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초점이 맞는 이미지보다 흐릿한 캔버스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흐릿함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뭔가 생략된 것이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고 다소 흐릿한 것이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   

혼란스럽고 선정적인 소식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요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바랬다. 잠시 세상을 흐릿한 채로 놔두고 가만히 앉아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기를. 내면으로 좀 더 침잠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내 삶이 지금보다 더 충실하고 충만해지기를. 그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나만의 틀을 깨고 나가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