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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14. 2024

너도 나도 서로 시절이 어긋났을 뿐인데

겨울비 오는 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


한 번도 울리지 않는 내 휴대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소파처럼

식탁과 마주 앉은 빈 의자처럼

혼기 놓친 여자 같은 계간지 표지처럼

뒷마당 대추나무 끝에 글썽글썽 맺혀 있던 빗방울처럼


옛 애인 같던 새벽녘 강릉 교동택지 맥줏집도

교항리 간선도로변 생맥주 카스타운도

꾸둑꾸둑 말린 장치찜 큰 축항 월성집도

찬 소주 곁들인 도루묵찌개 주문진 터미널 포장마차도


다만 겨울비가 좀 내렸을 뿐인데

겨울비도 나도 변명하고 있었다

너도 나도 서로 시절이 어긋났을 뿐이라고




강세환 시인의 <겨울비 내렸을 뿐인데>를 읽게 된 건 순전히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얼마 전 비가 내릴 때 아직 봄이 오지 않았는데 이 추위에 비라니, 하고 푸념을 했었다. 날씨 탓 계절 탓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나 자신을 탓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겨울, 어느 주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살아야 할 때가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는 공원 벤치, 잠잠하기만 한 휴대폰, 텅 빈 하늘. 모든 것이 허(虛)했다.


마침 그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때아닌 비가 내렸을 뿐인데도. 뭔가 어긋났을 뿐인데도 그 어긋남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지 못했다. 각박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도 예전의 나를 찾을 수 없었다. 비는 곧 그쳤지만, 虛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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