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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 앞의 계절 Mar 10. 2021

은결이의 밥상

 



   은결이는 곱 살이에요. 키는 또래들과 비슷해요. 오늘은 머리에 예쁜 나비 한 마리 꽂았어요. 몸무게는 친구들보다 살짝 더 나가요. 뚱뚱하진 않아요. 왠지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아요. 먹는 걸 가장 좋아해요. 아니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해요. 난 만드는 건 싫어했어요. 먹는 것만 좋아했어요. 그리고 멋진 부엌 용품이 없었어요. 그 점은 정말 부러워요.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밥상을 펴는 일이에요. 밥상은 곰돌이 모양이에요. 우리 땐 그냥 동그라미였어요. 그다음에 부엌으로 가요. 밥을 하려는데 쌀이 없대요. 여기저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찾아다녀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울기 직전이에요. 눈물이 동글동글 맺히려는 순간 쌀을 찾았어요. 싱크대로 가요. 쌀을 씻어 밥통에 앉혀요. 밥솥의 버튼을 눌러요. 밥주걱 없다고 또 한참을 두리번거려요. 밥주걱을 찾더니 밥솥에서 밥을 푸네요. 밥을 퍼서 밥상 위에 올려놔요. 저런 섬세한 디테일은 어디서 배운 걸까요?


  이번엔 인덕션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놔요. 우리 집에도 없는 인덕션이 은결이에겐 있네요. 돈 좀 벌면 인덕션을 준비해야겠어요. 은결이도 쓰는 인덕션 아주 좋아 보여요. 편해 보여요. 저기에 반찬을 하면 더 맛있을 것 같아요. 빨간 불이 들어와요. 계란 프라이를 해요. 노랗게 익은 프라이를 접시에 담아 상에 올려요. 그다음엔 쿠키를 구워요. 오븐도 제법 잘 작동돼요. 노릇노릇 익혀요. 이번엔 포도를 찾아요. 믹서기에 넣고 포도를 갈아 주스를 만들어요. 버튼을 누르면 드르륵드르륵 소리가 나요. 딸기도 갈고 당근도 갈아요. 이번엔 프라이팬에 생선을 구워요. 생선이 맛있게 구워져요. 토스터기에 식빵을 넣어요. 버튼을 누르면 식빵이 톡, 튀어나와요. 접시에 담아 상에 놓아요. 하얀 계란 두 개를 꺼내더니 냄비에 넣어요. 수도를 틀어 물을 붓고 계란도 삶아요. 정말 기가 막혀요. 각각의 부엌 용품들은 정말 내가 집에서 쓰는 것들과 다르지 않아요.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크기가 작다는 거예요. 주방의 동선까지 신경을 써서 배열이 되어 있어요.


  밥상에 반찬이 한가득이에요. 그런데도 은결인 아직도 맘에 안 드나 봐요. 아직도 바빠요. 프라이팬에 고기도 굽네요. 정말 맛있게 생겼어요. 브로콜리를 들고 찾아왔어요. '이건 어디다 놔요? 놓을 데가 없어요.' 이미 밥상이 거의 꽉 찬 상태라 일곱 살 은결이는 놓을 데가 없다고 들고 온 거예요. 그럴 땐 반찬들 사이를 조금씩 좁혀서 놓을 자리를 만들어 줘요. 그 틈새에 끼여 반찬 한 가지가 더 늘어요. 임금님 수라상 같아요. 모르긴 해도 임금님 수라상 차리는 수라 상궁보다  은결이가 반찬을 더 잘하는 것 같아요. 수라상을 실제로 보진 못했지만 은결이가 차린 밥상이 훨씬 더 맛있어 보여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꽉 찬 밥상은 처음 봤어요. 얼마나 많이 차렸는지 가짓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네요. 음식을 만들면서 한 번씩 '선생님, 배 고파요? 맛있는 거 만들어 줄게요' 확인을 하곤 해요. 그럼 저는 말하죠. '네 맛있게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더 열심히 반찬을 만들어요.

파를 가져오더니 찌개에 넣는다며 칼로 자르고 있네요. 또 한 번 저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어요. 요즘에 대파값이 엄청 비싸요. 한 단에 6천 원 이더라고요. 파는 필요한데 너무 비싸서 파를 넣어야 할 곳에 넣지 않고 그냥 음식을 만든 적 있거든요. 저보다 은결이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장인 같아요. 저는 그것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불러요. 저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 만든 음식인데 얼마나 맛있을까요? 그걸 지켜보는 내내 반성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집에서 음식을 만들 때 은결이처럼 정성을 다한 것 같진 않아요. '어떻게 하면 한 끼 때울까? 대충대충 만들어 먹어야지. 이러면서 양념도 대충 있는 것들만 넣곤 했거든요.


  승현이는 은결이 옆에서 인형놀이 중이에요. 아기를 재우는 중인에 은결이가 아기가 운다며 아기를 데리고 가려해요. 승현이가 안 주려고 해요. 잠시 은결이와 승현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돼요. 그러면 중재에 나서요. 먼저 가지고 놀던 승현이에게 은결이가 허락을 맡아요. '내가 아기를 데리고 놀아도 될까?' 그러면 승현이가 허락을 해줘요. 겨우 안정됐어요. 친구들 사이는 다시 좋아져요. 관계란 어쩌면 저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네가 먼저 해' '아냐 네가 먼저 해' 서로 양보할 줄도 알고 친구를 헤아려주기도 해요. 실은 투닥투닥할 때가 더 많아요. 오늘은 서로 기분이 아주 좋은 경우예요. 다행이에요. 그건 어른들 세상도 그렇잖아요. 그날 기분이 좋은가 나쁜가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잖아요. 아이들 세상도 어른들 세상과 같아요. 다만 나이가 많고 적고 그 차이만 있을 뿐이에요. 사이가 좋다가도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서로 자기 거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해요. 정말 그럴 땐 난감해요. 서로 자기가 가지고 놀겠다고 포기를 안 할 때도 많아요. 아직은 어린아이들 이니까요.  


  은결이는 음식을 만들고 조리하고 차리는 것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은결이가 차린 밥상에서 밥 먹는 건 아직 못 봤어요. 혹시 모르죠? 제가 안보는 사이에 먹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못 본 것 일수도 있어요. 한참을 음식 하느라 진을 뺀 은결이는 실제로 배가 고프다고 졸라요. 12시가 돼야 식사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밥을 줄 수가 없어요. 시간이 돼야 밥이 오거든요. 조금 기다리라고 했더니 다시 조리대 근처로 가서 또 다른 음식을 만드네요. 열심히 음식을 만드는 사이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요. 점심을 먹기 전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은 본인이 스스로 정리를 해요. 그 많은 음식들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요즘 티브이에서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그램 있잖아요. 티브이 볼 필요 없어요. 은결이를 보면 돼요. 음식을 만들 때도 디테일을 살려 음식을 장만하듯 정리할 때도 놓는 장소를 잘 찾아서 꼼꼼하게 정리를 해요. 정리도 저보다 훨씬 더 잘해요. 접시는 접시대로. 냄비는 냄비대로, 프라이팬은 프라이팬대로 그릇은 그릇대로 차곡차곡 정리해요. 저는 그걸 볼 때마다 '인정'이라고 마음속으로 속삭이곤 해요. 은결이에겐 '정리 잘했어요' 한 마디만 하지만요. 정말 최고예요.  


  은결이의 집중력을 칭찬해요. 한 가지 일에 저렇게 집중하는 걸 보면서 저도 반성하게 되네요. 취미 생활한다고 작년에  플롯을 샀어요. 코로나로 몇 번 수업이 연기됐어요. 생각엔 금방 될 것 같았는데 생각처럼 안되니까 짜증도 나고요. 그러다 자연스레 그만두게 됐어요. 결국은 포기했어요. 열정과 끈기 부족이에요. 은결이 보다 못하네요. 우리도 음식 만들다 보면 진이 빠지잖아요. 음식 만들면서 미리 맛을 보기도 하고요. 아이들 밥상은 밥과 국, 반찬 3가지예요. 그리고 후식으로 과일이 나와요. 오늘은 김치찌개와 생선, 감자 샐러드가 나왔어요.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생각 안 나네요. 생선은 정말 아이들이 싫어해요. 생선을 먹는 아이들 표정이 일그러져 있어요. 고기가 나올 때는 정말 잘 먹거든요. 그런데 생선은 살을 발라줘도 잘 안 먹어요. 저도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생선 싫어했어요. 가시도 싫었고요. 가시를 잘 발라서 살만 골라줬는데도 잘 안 먹어요. 그런 거 보면 우리 때나 지금의 아이들이나 싫어하는 건 비슷한 것 같아요. 아이들은 정말 천천히 밥을 먹어요. 생각해 봤어요. 직장 생활 중에도 밥을 빨리 먹었어요. 구내식당이 있었어요. 교대로 식사를 해야 했거든요. 내가 빨리 식사를 하고 가야 다른 동료가 또 가서 식사를 하니까 나도 모르게 빠른 식사가 몸에 뱄어요. 그래서 밥을 정말 빨리 먹어요. 15분도 안 되는 시간에 후다닥 먹곤 했어요. 아이들 반도 먹지 않았는데 저는 벌써 다 먹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 된 것 같아요. 밥을 빨리 먹는 버릇은 좋지 않은데 말이에요. 아이들에게도 배울 점이 많아요. 어른은 아이들보다 모든 걸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내일부터는 천천히 밥 먹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은결이에게 배울 점이 또 있어요. 은결인 은결이에게 주어진 밥과 반찬은 거의 다 먹어요. 전 편식이 심하거든요. 양파, 고추 이런 거 잘 안 먹어요. 우린 자율배식이라 자기가 먹기 싫은 것은 안 가져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아이들 밥상은 선택권이 없어요. 싫든 좋든 먹거나 안 먹거나 해야 하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한두 가지만 먹고 나머진 안 먹어요. 그런데 은결인 거의 다 먹어요. 매운 고추 정도만 안 먹는 것 같아요. 나머지 반찬들은 남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하물며 저도 먹지 않는 매운 양파도 아주 잘 먹어요. 그것도 꼭꼭 씹어가며 정성 들여 먹어요. 반찬에 든 양념들까지도 꼼꼼하게 젓가락으로 집어서 먹어요. 음식 만들 때도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들더니 점심시간에도 정말 알뜰살뜰하게 식사를 해요. 저렇게 완벽한 은결이를 저따위가 어떻게 이기겠어요. 물론 이기고 지는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판정을 내린다면 당연히 은결이가 승이죠. 저는 두말할 것도 없이 패자예요. 오늘은 제가 일곱 살 은결이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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