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팔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계약할 수 있었다. 역시나 5000평을 한번에 빌리는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일부만을 대여했고, 나머지는 가을부터, 또 다른 땅은 내년에나 대여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계약한 땅에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고, 땅이 더 얼기전에 나무를 심기로 했다. 제대로 서두른다면 다가오는 봄부터 우리가 심은 나무에서 돋은 새순을 볼수 있을것이다.
남편은 주말마다 농장으로 출근을 했다. 일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남편은 평일에도 회사생활이 고된 편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7시에 회사로 출근을 해 밤 9시나 되어서야 퇴근을 하는 일상이었다. 낮에도 얼마나 바쁜지, 커피한모금을 천천히 마시지 못할 정도라고했다. 그런데 주말 이틀을 오롯이 농장에서 강도높은 육체노동을 하니 , 정말 보통일이 아닌것이다.
그전까진 주말을 항상 온가족이 함께 보냈다. 자연을 좋아하는 남편은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다녔다. 집에서 온종일 뒹굴며 쉬고싶은 마음이 없었을리 없다. 그래도 남편은 고맙게도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에선 매주 월요일이면 주말동안 무얼하며 보냈는지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버님이 정말 잘 놀아주시나봐요. 월요일 발표시간에 매번 똑같은 얘길 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그런데 우리겸이는 매주 하는 이야기가 달라요. 아빠덕에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더 밝게 자랄 수 있겠어요. "
주말마다 조개를 잡으러 다니고 산에 가거나 캠핑을 다녔다. 그러던 남편이 주말마다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가게 되고보니, 이제 우리아이들의 주말환경은 아파트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코로나가 발발하기 시작할 무렵이어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많이 심심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주말마다 아이들은 온종일 아빠를 기다렸다. 나또한 시계를 보며 오매불망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쉬지 못하고 일하러 나가는 남편이 안쓰럽기도하고 걱정도 되었다.
많이 힘들텐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따끈한 저녁상이라도 차려주고 싶어 메뉴를 고민하고 시장을 보았다. 그렇게 밥을 해놓고 기다려도 남편은 제시간에 집에 오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기다리다 못해 아이들이 먼저 저녁밥을 다먹고 치운 후에야 돌아오곤 했다.
밤에 집에 와서도 남편은 잠을 편히 자지 못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갑자기 사용해서 근육통이 오는 것이다. 평일엔 하루 12시간 이상을 회사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지식노동자였다. 운동체질의 남자이긴 하지만 평상시 회사에서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 주말마다 이어지는 강도 높은 노동은 무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몸이 너무 피곤한데도, 근육의 통증으로 잠을 편히 잠들지 못하는 상황 이라니... 많이 안쓰러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딱히 없었다.
하우스를 짓는 곳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보고 싶었다. 아빠가 일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고, 지어지는 농장의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주변 논밭에서 뛰어놀며 기다리다 아빠와 함께 밥도 먹으면 좋을텐데... 갈 수가 없었다. 현장분위기가 너무 타이트 하기도 했고, 위험하기도 했다. 일하는 아빠에게 방해가 될 게 뻔했다.
그렇게 겨울엔 하우스가 지어졌고, 나무가 심어졌다. 그후에도 대 농장의 할일은 너무 많았다. 남편이 집에 돌아와 현장의 이야기를 실랄하게 할때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우스에 올라가는게 그렇게 위험하다며...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자 남편의 귀가 시간이 더 늦어졌다. 겨울엔 저녁이 되면 추워지기 시작해 일을 하기힘들었지만 , 날이 더워질수록 이젠 낮에 일을 하는게 힘들게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고 낮을 피해 저녁늦게까지 일을 했다. 주말만 되면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쉬지도 못하고 하루 온 종일 하우스에 나가 일을 하고 있을 남편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이었다. 검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빠를 향해 달려드는 아이들까지 마다하고 남편은 바삐 세탁실로 향했다. 옷을 막 벗으려는데 남편의 까만 티셔츠에 하얀 가루가 잔뜩 얼룩져 있었다.
" 어머 이게 무슨 가루야 ? 뭐가 묻은거야 ? "
바로 뒤따라가며 물었다.
" 뭐긴 뭐야, 땀이 말라서 생긴 자국이지..."
나는 경악했다.
" 뭐? 땀이라고 "
믿을수 없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땀이 흐르고 마르기를 반복해, 몸에서 나온 염분이 얼룩진 것이다. 그런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해본적도, 노동을 해본적이 없는 나는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 말도 안돼 . 땀이 이렇게 날 정도로 일을 한거야 ? "
사람 몸에서 이렇게 땀이 날수 있단말인가 ...
얼마나 땀을 흘리고 마르기를 반복해야 이렇게 하얀 가루가 잔뜩 낄 정도가 되는가...
남편은 그렇게 열정을 다하고 있었다.
" 아이고 , 오늘도 고생했네... "
' 내일은 쉬어 !'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다음날 또 나가려는 남편을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 어떻게 혼자 쉬어 , 할 일은 해야지 "
남편의 근육통은 서서히 줄어들긴 했지만,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온날은 여전히 힘들어 했다. 하루를 그렇게 일하고나면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모두가 모여 일하고 있는데, 혼자만 가지 않을수도 없었다.
농장엔 일을 도와주는 어르신 부부만 있는게 아니었다. 어르신부부에게는 3년전부터 주말마다 농장을 오가며 농사일을 배우고 있던 중학교 후배분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회사의 부장님이셨다. 그분은 정년을 3년앞둔 상황이었고, 정년을 준비하며 농사일을 배워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큰 대형마트 회사에서 농산물 유통을 오랫동안 맡아오신 분이셨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리가 농장을 준비하면서 그분도 함께 농장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다 함께 일하는 곳이었으므로 남편 혼자만 빠질 수는 없었다.
주말마다 농장에 가서일을 했지만, 어쩌다 가끔 쉬게 되는 날이 있었다 . 그날은 올해 2020년 3월 22일 이었다. 드디어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지어진 농장을 구경하러 갔다.
여기 저기 자재들이 쌓여있어 어수선 했다. 남편이 고생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아 감회가 남달랐다. 남편 혼자지은건 아니었지만, 함께 노력해주신 분들과 함께 흘린 땀의 결과였다.
" 다들 수고 많았네... "
농장 한켠에서 달래가 잔뜩 자라고 있었다. 남편이 삽으로 달래를 캐주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내 농장에서 캔 달래로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 맛있는 달래 장아찌를 만들어서 남편과 함께 삼겹살에 싸먹어야지 '
이제 이곳은 내땅이고, 내 농장이다. 많이 뿌듯하고 설레었다. 새로 심어진 사과대추나무들은 어찌나 여리고 작은지, 나무가 귀여워 보이긴 처음이었다.
" 에고... 작은 나무들이네... "
이제 자식 같이 키워야할 우리의 나무들이다.
3월은 코로나의 공포가 막 시작되던 때였다. 첫째의 3학년 등교가 미뤄졌고, 마트가 아니고서야 집밖으로 나다니기도 힘든 분위기였다. 하지만 시골은 그나마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군청근처 구경도 할겸 읍내 맛집을 찾아가 맛있는 점심을 사먹었다. 얼마만의 외출이었는지, 한동안 집안에만 있던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했다. 아빠와 몇달만에 함께 보내는 주말이었고,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한참을 뛰어놀던 농장에서의 시간과, 코로나 위기에 언제 또 가능할지 모를 맛있는 외식까지... 그날은 우리 가족모두에게 참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