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MIN Apr 24. 2020

'보호자'라는 이름의 무게

노리의 동물병원 야간 진료를 받고 온 뒤



  노리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씹어 먹는 걸 좋아했다. 바스락 소리가 나는 세탁 비닐부터 시작해서 종이로 된 쇼핑 봉투나 얇고 하늘하늘한 끈에 이르기까지. 동물병원 선생님에게 물어봤더니 일단 무조건 치워두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하기에 평소부터 되도록 창고 같은 곳에 넣어두는 편이었다.


어제는 낮 시간에 얇은 리본이 두 가닥 달린 장난감을 무심결에 거실 장식장 위에 두고 말았다. 깜빡하고 방에 들어와서 여느 때와 같이 일상을 보냈는데 노리가 그걸 발견하고야 말았다. 노리가 뭔가 씹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엄마가 말을 해줘서 뒤늦게 달려갔으나 35cm, 그러니까 내가 손을 쫙 벌렸을 때 엄지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에 이르는 길이의 끈은 이미 노리의 입 속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 후로 집에 있는 고양이 관련 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유튜브 영상 등 온갖 정보를 찾아보며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이 응급 상황에 해당하는 것이 맞는 건지, 과민한 보호자인 나의 유난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고 이전에 그러곤 했던 것처럼 노리가 저걸 토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평소에 다니던 고양이 전문 동물병원은 이미 문을 닫은 시각이어서 24시간 운영되는 낯선 동물병원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이 과잉 진료를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고, 감당 못할만한 진료비를 청구하지는 않을까 염려도 됐다.


계속되던 고민 끝에 일단 병원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간혹 상시 진료하는 곳에 잘못 갔더니 잘못된 치료를 해줘서 봉변을 당했다던 커뮤니티의 글과는 달리 고양이를 본다는 것이 명시된 곳이었고 후기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감사하게도 전화로 문의를 했을 뿐임에도 수의사 선생님이 병원에 노리를 데려오면 할 수 있는 처치에 관해 자세하게 상담을 받을 수 있었고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노리를 데리고 동물병원에 가기로 했다.


신나게 뛰어놀다가 이제 막 잠들 준비를 하던 노리에게 뜬금없는 외출은 봉변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나의 판단은 타당했다. 구토를 유발하는 진정제를 맞은 노리는 돌돌 뭉쳐진 노란 끈을 뱉어냈다. 만약 그 끈이 장까지 내려갔다면 일부는 위에 걸리고 나머지는 운동을 계속하는 장으로 내려가 개복 수술이 필요한 단계까지 갔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집에 돌아온 노리에게서는 평소에 풍기던 특유의 꼬질꼬질한 냄새가 아니라 낯선 병원 냄새가 났다. 평소 가족들이 말하는 ‘노리 냄새’란 착실한 그루밍의 결과였던 모양이다. 병원에서는 진정제의 여파가 하루에서 이틀까지 갈 수 있다고 했고 아주 드물게 1% 정도의 확률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이상이 있을 경우 바로 데리고 오는 것이 좋다고 했다.


평소에 놀아달라고 따라다니면서 칭얼거리고, 돌돌 굴러다니는 털 공처럼 집 안을 활보하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어서 동공이 풀린 채로 인형처럼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는 노리를 보고 있기가 불안했다. 아주 낮은 확률이라고는 하지만 문제가 생길까 봐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고 노리 옆에 붙어서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걷는 것이 평소에 비해 어설프고 전반적으로 움직임이 없기는 하지만 다행히 이젠 꾹꾹이에 골골송도 할 정도로 나아졌고 식욕도 돌아왔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두 고양이의 ‘보호자’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리본을 무심결에 노리 손 닿는 곳에 둔 나의 찰나의 실수로 노리는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만약 내가 야간 진료비가 아까워 노리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면, 만약 병원에서 진정제를 투약한다는 내 결정이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일어날 수 있다는 문제 상황으로 이어졌다면. 


모든 것이 보호자라는 명찰을 단 내 선택으로 말미암은 결과였고 그 끝에는 내 고양이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순간의 방심과 핑계가 여생의 후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사료, 다이어트, 양치, 놀이시간 확보 등 평소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미뤄오던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나는 평소에도 미루는 것을 좋아하는 게으른 성정의 사람이지만 내 고양이들과 오래도록 함께 하기 위해서는 당장 오늘부터라도 바뀌어야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도블록 위의 '터키쉬 앙고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