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은 큰 칼'

2020.2.21 작성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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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차를 타고 코엑스를 가는데 억수같이 비가 왔고, 비를 보고 그를 떠올렸다. LG헬로비전 부산 00센터 소속 인터넷 설치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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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0분 만에 돈까스를 입에 털어넣으면서도 멀리서 온 우리에게 점심을 못 대접한 걸 걱정했다. 그리고 물 한 잔 못 마시고 열 네 집을 돌았다. 어떤 집은 언덕배기였고 어떤 집은 기껏 찾아갔더니 부재중이었다. 어떤 집은 술 취한 고객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해서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 과하게 쩔쩔맸다. 왜그러시나 싶어 물어보니 신규 가입 건이라 사인을 받아가야 실적에 포함된단다. 내가 다 녹초가 되는 기분이었다. 해가 지고나서 호텔에 들어왔더니 발바닥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기사가 저녁에도 AS를 하러 간다고 했던게 떠올랐다. 이렇게 하고서 그들이 받는 임금은 매달 220만원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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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취재하면서 내내 슬픈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진짜 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죄책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괜히 인터넷 설치기사를 취재하겠다고해서 이 분을 알게됐네'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일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었다. 그는 비 오는 날 전봇대를 오르다 사고가 많이 난다고 했다. 사다리는 미끄럽고 줄엔 고압전류가 흐르니까. 그래서 코엑스 가던 길에 그가 오늘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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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착카메라를 맡게 된데엔 다 뜻이 있겠지 생각했다. 밀착은 기자들이 어디보다도 더 각자 캐릭터를 뽐내는 코너라고 생각해서, 내 캐릭터는 뭘까 고민을 했다. 기깔나는 스탠덥은 내 장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민한테 재밌는 멘트를 얻어내는 것도 잘하는 기자들이 많았다. 난 스피커가 없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게 좋았다. 어린이라든가 노인, 소수자처럼 딱 정해진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나 어떤 곳에선 강자가 되고 어떤 곳에선 약자가 된다' 할 때 그 약자. 남을 착취해 탐욕을 부리는 행위가 당연하고 약자에게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사회에, '안그래야 하는거 아냐?' 하고 싶었다. 근데 매주 방송이 나가는 밀착으로 그렇게 하는건 분에 넘치는 작업인 것 같았다. 악인이 맨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적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데 그게 내 깜냥에 버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혼자 고민을 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산신령처럼 어떤 선배가 나타나서 말씀하시길 "밀착은 큰 칼"이라고 했다. "뉴스에서 한 기자에게 4분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 시간이니까, 잘 써라" 라고. 고민 없이 앞으로도 나쁜걸 잘 잡으러 다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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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를 꿈꾸는 후배에게 '저널리즘의 기본원칙'과 '방송뉴스 기사쓰기' 책 선물을 했다. 앞장에 뭐라고 쓸지 고민하다가... "바쁘고 번잡한 세상에서도 원칙을 마음에 갖고 사는 기자가 되길" 이라고 썼다. 책을 쓴 교수님들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한 분은 '너무 민망하네' 라고 하셨고, 한 분은 '밀착카메라라, 열심히 걸으셔야겠군' 이라고 하셨다. 열심히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