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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Feb 04. 2018

나는 왜 이토록 불안한가

프란츠 카프카 ,『변신』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누구나 그렇겠지만, 살아오면서 힘든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할 때도 있었고, 젊은 날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기도 했다.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적도 있었다.


그때 몹시 우울했던 날 오후, 거리의 풍경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아무 일 없다는 환한 표정으로 도시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화가 날 지경이었다. 당신들은 내가 없어진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 그런 당신들이 괘씸해서라도 나는 독하게 살아낼 것이다! 고통스러우니 그 풍경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이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서로가 그런 존재일 뿐이다. 막상 우리는 서로 간에 그렇게 가깝게 연결되어 있지 못하다. 우리는 단절되어 있다.



현대인의 절박한 고립감


프란츠 카프카의 일생은 겉으로 보기에는 굴곡이 없는 일상적인 삶의 연속이었지만 내면으로는 매우 불행한 고뇌의 41년이었다. 카프카는 평생 불행하게 지냈다.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나 유대교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기독교인도 아니었다.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인도 아니었고,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체코인도 아니었다. 그는 일상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작가이길 원했지만 온전한 의미의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많은 세계에 조금씩 속해 있지만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이었으며, 숙명적으로 고독의 짐을 지고 살았다. 이러한 작가의 현실은 그의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인간의 실존에 관한 물음이 카프카 문학의 주제가 되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현대인의 고립감을 절박하게 표현해낸 걸작으로 오늘날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외로운 죽음에 관한 얘기다.


 그레고르는 의류 회사의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는 젊은이였다. 그는 부모님의 빚을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외판 업무는 짜증스런 일이었지만, 그레고르는 자신의 희생이 가족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는데, 자신이 침대 속에서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지만, 꿈은 아니었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자 지배인이 집에 찾아온다. 근무 태만이라고 비난하는 지배인에게 그레고르는 방 안에서 변명하지만, 지배인은 그레고르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이제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는 사람들과 소통을 할 수가 없다.


그레고르가 방문까지 몸을 질질 끌고 가서 간신히 열쇠로 방문을 열고 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가족들과 지배인은 충격에 휩싸인다. 그레고르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었고,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레고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 방 안으로 나는 듯이 빠져 들어왔다. 그러자 아버지는 방을 꽝 닫아버린다. 이제 그레고르는 방 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해오던 그였지만, 가족은 점차 그를 해충 보듯이 한다. 가족은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 더 이상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그를 외면한다.


이처럼 『변신』은 벌레라는 존재를 통해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 가족은 그에게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가 벌레가 되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그는 집안의 골칫거리로 전락한다. 그레고르의 존재는 곧 가족의 중심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레고르의 외로운 죽음


그날 이후 그레고르는 방에서 꼼짝도 않고 단조롭고 무료한 생활을 하게 된다. 여동생은 이제 그레고르를 돌보는 일에 회의를 느낀다. 그레고르 때문에 힘들어 하는 가족들 틈에서, 그레테는 이제 오빠 그레고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저는 이 짐승을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우리는 저것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저것을 보살피고 참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잖아요. 그 누구도, 그리고 저것도 그런 일로 우리를 비난하진 못할 거예요.”


아버지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가족의 대화를 들은 그레고르는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그레고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급히 문이 닫히고 굳게 빗장이 걸렸으므로 그는 갇혀버렸다. 그레고르는 방 안에서 편하게 죽음을 맞는다.



소외된 삶에서 도피하고자 변신해봐도


쇠약해진 몸으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지냈던 그레고르의 죽음은 사실상의 자살이었다. 카프카가 그레고르를 벌레로 변신시켰던 것은 절망 속에서 자유의 출구를 찾으려는 모색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르의 죽음은 그 변신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가족에게는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가족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레고르가 죽자 잠자 씨 가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세 사람은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잘 생각해보면 그들의 장래도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 잠자 부부는 차츰 생기가 돌아오는 딸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최근 근심과 고생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해 있음을 깨달았다. 잠자 부부의 눈에 그런 딸의 모습은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보증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불안한 존재


변신이라는 가상의 전제 앞에서 그레고르의 가족은 유죄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속성은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아들의 변신을 계기로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벌레를 치운 후 딸의 ‘젊은 육체’에서 미래의 희망을 보고 소풍을 떠나는 결말은 비인간적인 육체 못지않게 비인간적인 존재방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레고르는 돈을 버는 동안에는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이제 그 기능을 못하게 되자 그의 존재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가족 간의 사랑보다 물질을 더 중시했던 가족들은 무관심과 경멸 속에 결국 그레고르가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둔다. 자신의 바람과 다르게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러나 벌레로 변한 뒤 가족의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레고르의 모습은, 언제 어느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하고 절망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의 변신과 죽음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불안한 존재인가를 말해준다.


사실 우리는 다 그레고르 같은 존재다. 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언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불확실하기에 불안하다. 청년들은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가 걱정거리이고, 중장년이 되면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있을지가 또한 걱정이다. 나이 들어 은퇴를 하게 되면 노후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쳐왔을 때 과연 누가 나를 도와줄 것인가, 무엇이 내게 힘이 되어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분명하지 않다. 설마하니 그레고르도 자신이 아무리 벌레가 되었다 해도 여동생과 아버지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해서 맺어진 관계는 우리에게 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 필요가 사라졌을 때 과연 그 관계가 유지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결국 믿을 것은 나의 힘


미디어를 통해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던 시절, 나에게도 ‘팬’이라는 층이 있었다. 내가 표현하는 정치적 견해가 자신들과 같으면 응원을 보내주었다.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나왔을 때, 그래서 같은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서 떠나갔다. 마치 썰물처럼. 누구라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같은 편’이라는 사실이지 나라는 실존적 주체가 아니었다.


한때 환호했던 많은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냉소하면서 곁을 떠나간다. 서로가 기능적 필요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을 뿐, 그 관계는 아무 의미 없는 소외된 관계였던 셈이다. 어느 날 벌레가 되었다고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던 그레고르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레고르처럼 죽어갈 일이 아니다. 애당초 누구에게 의존하지 말고 내 힘으로 살아갈 생각을 했어야 한다. 나를 일시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며 살아갈 일이 아니다. 그 착각으로부터 필요 이상의 당황스러움과 낭패감이 생겨나게 된다. 상처받지 말고 담담하게 대할 일이다. 그레고르의 불쌍한 죽음 앞에서, 나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어떤 불안도 감당할 수 있도록.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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