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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Feb 25. 2018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움베트로 에코, 『장미의 이름』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진리는 하나일까 여러 개일까. 참된 것을 찾겠다며 진리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따라다녔던 물음이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서로 다른 진리들이 존재했고, 진리를 말하는 서로 다른 방식들이 있어왔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리인가. 아니 모두가 받아들이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판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다수가 믿는 것이 진리인가, 아니면 권력이 지지하는 것이 진리인가. 그 사회가 말하는 진리를 의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온한 일인가. 진리를 둘러싼 궁금증이 커지는 가운데 읽은 책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었다. 


흥미진진하고 깊이 있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


『장미의 이름』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일단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계속 궁금증을 자아내는 추리소설의 매력이 있고, 연쇄 살인사건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탄탄한 구성도 돋보인다. 무엇보다 소설 이상의 소설이라는 깊이가 있다. 철학, 기호학, 신학, 중세사, 미학을 망라하는 인문학 책으로 다가온다. 또 읽다 보면 중세에 대한 에코의 방대한 지식을 접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 작품에도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진리’에 대한 모색을 읽었다. 중세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해가면서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는 것이 이 작품의 궤적이다. 눈이 먼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편을 수도원 장서관에 숨겨놓고, 그 책에 접근하는 젊은 수도사들을 한 명씩 죽게 만든다. 그는 전통적 교리만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낡은 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절대적 진리에 대한 그의 집착이 수도원의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호르헤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다.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진리에 대해 호르헤와 대립되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비판하며, 오히려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진정한 진리라고 믿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진리를 둘러싼 두 사람의 충돌, 그 복선을 깔고 소설의 첫 페이지에는 진리에 관한 말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진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연쇄 살인사건의 시작이고, 수도원을 잿더미로 만드는 파국을 낳는다. 



수도사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1327년 11월 말 영국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이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윌리엄의 도착과 함께 수도원에서는 끔찍한 연쇄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윌리엄과 제자 아드소는 조사에 나섰지만 의문의 죽음은 계속 이어진다. 윌리엄은 살인이 「요한묵시록」의 예언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미궁 같은 장서관을 헤매며 추적한다. 하지만 윌리엄의 생각과 달리 연쇄 살인사건의 원인은 장서관에 단 한 권 보관되어 있는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웃음의 문제를 다루었고,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에 바람직한 것일 수 있으며 진리의 도구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르헤는 웃음을 악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웃음이란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것으로 육체의 파멸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수도사들이 읽어서도 안 되고, 그 책이 세상으로 나가서도 안 된다고 믿는다. 그는 이 책을 읽는 수도사들이 웃음에 탐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책장에 독약을 묻혔다. 그래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던 수도사들이 연이어 변사하게 된 것이다. 연쇄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윌리엄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장서관에 숨겨둔 책에 접근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미궁 같은 장서관을 뒤지던 윌리엄과 아드소가 비밀스러운 마지막 방 ‘아프리카의 끝’에서 호르헤를 마주치면서 소설은 절정을 맞는다. 


 웃음을 그토록 두려워한 이유


왜 하필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읽히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했느냐는 윌리엄의 물음에 호르헤는 이렇게 답한다. 웃음은 우리를 잠시 동안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지만, 우리 죄 많은 인생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나면 우리는 뭐가 되겠느냐고.


그러나 윌리엄은 호르헤를 향해 외친다.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


윌리엄이 책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지만 호르헤는 책을 집어던지더니 그 위에 등잔불을 던진다. 순식간에 불길이 번지면서 장서관을 태웠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불덩어리가 되어버린다. 잠을 자고 있던 수도사와 필사가들이 달려나와 불길을 잡으려 해보지만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은 장서관을 불태운 데 이어 교회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린다.


진리라는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진리


불타버린 교회를 보면서 윌리엄은 아드소에게 말한다. 


“오늘 우리는 가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지나친 믿음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죽어가게 만든 호르헤는 ‘가짜 그리스도’였다. 윌리엄은 진리를 과신하며 진리를 위해 죽는 자를 경계하라고 했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게 윌리엄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경계했다.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 그것이야말로 참된 진리인 것이다. 진리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수 없고 불변의 진리만이 있을 뿐이라고 믿었던 호르헤. 그는 수도사들의 의무는 하느님의 지식을 새롭게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느님이 만들어놓은 진리에 대한 절대적 신봉 그 자체이고, 우리는 그것을 손대서는 안 된다. 윌리엄은 진리에 대한 맹신의 파멸을 지켜보았다.


진리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진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의심받지 않을 진리란 없다. 우리는 진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해야 한다. 하나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추앙받고 반론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진보할 수 없다. 한 사회에서 진리가 하나여야만 할 이유도 없다. 저마다의 진리가 있는 것이고 여러 개의 진리가 공존할 수 있다. 우리는 복수의 진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관용을 베풀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은 대개 권력이나 숫자에 민감하다. 한 사회에서 진리는 권력이나 다수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사회의 주류가 진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쉽지 않다. 이념을 불문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은 이단자 취급을 받기 일쑤다.


나는 살아오면서 언제나 비주류였다. 독재권력 시대에는 그에 맞서는 것이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길을 갔다. 시간이 흐른 뒤 민주권력의 시대도 왔다. 하지만 질문을 접지 않았다. 거기에서조차 내가 꿈꾸었던 것과는 다른 그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늘은 그늘이라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을 이단자로 낙인찍는 것은 어느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변방의 비주류로 배회할 뿐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장이 윌리엄에게 “진리는 어디에 있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윌리엄은 이렇게 대답했다. 


 “진리는, 때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진리라는 것은 과연 있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도 찾던 진리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한다면 나의 유목민 같은 삶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의 내용 전체는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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