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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Mar 04. 2018

사유하는 정치적 삶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인간의 미래는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 홀로코스트는 20세기를 어둠과 죽음의 시대로 만들었다. 1933년부터 12년에 걸쳐 1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과 전쟁포로들이 나치 정권에 의해 짐승처럼 열차에 실려가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가스실에 흘러나오던 바그너의 〈순례자의 합창〉을 들으며. 인간을 유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전쟁과 학살 속에서 잃었던 사랑을 우리는 이제라도 되찾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각자의 생존을 위한 경쟁에 매달려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정치는 만인 간의 투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갈등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우리 인간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만났으니, 바로 한나 아렌트였다. 



나를 넘어 세계를 사랑하라


아렌트는 죽음의 전체주의 시대를 한복판에서 겪으며 살았던 정치사상가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그녀는 전체주의라는 근본악을 직접 경험하면서, 오늘의 인간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사유의 삶을 살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국적 없이 떠돌아야 했던 아렌트의 ‘뿌리 잃은’ 삶은 그녀의 정치적 사유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녀는 ‘고향 상실(homelessness)’, ‘뿌리 상실(rootlessness)’의 오랜 시간을 겪었기에 근대의 병리현상인 뿌리 잃은 사람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한 자신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전체주의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목격하고, 전체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에 대해 천착한다. 죽음의 시대 한복판을 살았던 삶이지만, 아렌트는 그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진리를 찾으려는 희망의 사유를 찾는다. 인간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의 ‘정치적 삶’을 통해 ‘세계사랑’(Amor mundi)을 실현하자는 것이 아렌트의 저작들을 관통하는 생각이다.


인간다운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의 조건』은 제목 때문에 인간 본성에 관한 책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막상 읽기 시작하면서 당황하는 사람이 많다. 아렌트는 “인간 조건은 인간 본성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제목에서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인간은 조건 지어진 존재’라는 의미다. 아렌트는 삶- 세계성 - 다원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전제하고 그에 상응하는 인간 활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상응하는 인간의 세 가지 활동이 각기 노동(labor) - 작업(work)- 행위(action)다. 그런데 생존과 욕구 충족을 위한 ‘노동’,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위한 ‘작업’만으로는 인간성을 실현하지 못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꼽는 것이 정치적 활동을 의미하는 ‘행위’다. 


그런데 폴리스가 있었던 고대와 달리, 근대에 들어서는 인간 활동에서 노동과 작업만 남게 되었고, 행위는 사라져서 ‘정치적인 것’의 쇠퇴를 낳았다. 아렌트는 이를 “노동하는 동물의 승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인간들이 생존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은 결과로, 이로써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는 자유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렌트는 ‘행위’를 통한 정치적인 것의 부활, 그리고 정치적 사유 능력과 실천 능력의 복원이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호소한다. 복수(複數)의 인간들이 함께 사는 세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강조한 아렌트의 생각은, 배타적 자아에 갇혔던 서양 정치철학의 전통을 전환시킨 의미를 갖는다. 


아렌트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진단하면서도, 개인의 이익이나 생존보다 세계를 더 배려하는 ‘세계사랑(Amor mundi)’을 말한다. “인간 세계는 언제나 세계에 대한 사랑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세계는 항상 사막이지만,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새로 시작하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며 우리들의 ‘새로운 시작’을 주문했던 것이다.   


정신적 삶과 정치적 삶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이 아닌 활동적 삶을 강조했다. 활동적 삶이란 곧 정치적 삶이다. 아렌트는 말기의 저작들을 통해 그러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정신적 사유로부터 찾는다. 『정신의 삶: 사유』가 출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저작들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비정치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이전 저작들과의 단절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활동적 삶을 말하던 아렌트가 정신적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한 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성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정치적 삶을 말했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무사유의 인간이 가져오는 참혹한 결과에 주목했고, 이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유의 세계를 말하게 된다. 아렌트의 마지막 저작 『정신의 삶』은 정치적 삶과 정신적 삶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녀가 말한 정치적 삶은 내면의 정신적 삶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고독한 사람은 혼자이며 그래서 “자기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나는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함께 “나 혼자” 있으며, 그러므로 한 사람-안에-두 사람인 반면, 외로움 속에서 나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모든 사유는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며, 나와 나 자신의 대화이다. 그러나 한 사람-안의-두 사람이 전개하는 대화는 같은 인간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다. 내가 사유의 대화를 함께 이어가는 동료 인간들이 이미 나 자신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아렌트가 말하는 ‘한 사람-안의-두 사람’의 사유의 대화는 결국 ‘나’와 ‘자아’ 사이의 대화다. 아렌트의 이 같은 생각은 소크라테스에서 기원한다. 소크라테스는 타인과 함께 사는 일은 자신과 함께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주는 교훈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는 내가 헤어질 수 없고, 내가 떠날 수 없으며, 나와 함께 밀착된 유일한 인격체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 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정치의 약속』 )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마지막 문장과 『정신의 삶』 첫 문장에서 반복해서 로마 철학자 카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인간이 혼자 고독 속에서 하는 사유는 결국 활동적인 삶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무사유의 위험성을 인식한 아렌트는 “사람들은 무사유가 일상화된 곳에서는 고찰을 통해 비판하는 계기를 갖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오직 사유하는 사람만이 기존의 질서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고 기존 질서의 규칙과 다른 새로운 규칙을 제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그러니 사유는 비판이고 행동이 된다.


정치적 삶의 빛과 그늘


아렌트 사상의 밑바탕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간직한 인간주의가 흐른다. 아렌트 사상의 입구와 출구는 사랑이었다. 세계사랑의 결실은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에 기여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족적 삶을 넘어 인간 공동체를 위한 삶을 주문하는 아렌트의 생각들은 ‘오늘 이곳에서 우리의’ 삶에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 점에서 보면 2017년 한국 사회가 성취한 촛불시민 혁명은 아렌트가 말한 세계사랑으로 가는 이정표 같은 역사적 사건이었다. 시민들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노동하는 동물’로 갇혀 있지 않았고, 낡고 부패한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섰다. 그것은 아렌트가 말한 행위, 즉 정치의 복원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시민들의 결단이었다. 활동적 삶과 정치적 삶, 사막을 바꾸려는 ‘새로운 시작’을 시민들은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정치적 삶에는 그늘도 따른다. 정치적 삶이 또 다른 구속을 초래하기도 한다. 정치에 과잉 몰입되어 인간이 피폐해지는 모습이 그것이다. 아렌트가 말한 정치는 다원적 인간들 사이에서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 의사소통 행위다.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치의 영역을 적대와 증오의 감정으로 덮어버리는 모습은 아렌트가 꿈꾸었던 정치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서는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 삶의 요체인 사랑은 거세되고 만다. 다시 정치는 사막이 되고 만다. 


그러한 새로운 병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아렌트가 말한 정신의 삶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인간은 내면의 사유와 의지를 통해 외부 세계를 자기 자신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정신의 내면성과 외부 세계의 통합이 가능해진다. 서로가 자기 이익을 넘어 초연한 사랑으로 대화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삶이 가능해진다. 내면의 사유와 정신적 삶을 배제한, 그래서 사랑이 거세된 정치적 삶은 종종 개인의 심성을 파괴하고 만다. 자기 이익만을 위한 정치를 통해서는 정치적 삶을 살 수 없다. 세계사랑으로 돌아갈 때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 오늘 우리의 일이다.


이 글의 내용 전체는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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