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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Mar 14. 2019

머리카락은 거짓말할 줄 몰라

텍사스에서 미용사로 산다는 것은   24화


결핍은, 헤어컷을 결정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거의 모든 손님은 본인들 머리에 불만이 있으면 있지, 만족은 없어 보였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도, 숱이 많아도 불만이라고 말하지, 좋아 죽겠다고 말하는 이는 못 봤다. 물론 헤어컷을 하러 와서 하는 말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스타일리스트로선 머리숱이 적어서 고민인 손님, 탈모가 너무 많이 진행되어 이젠 더는 손 쓸 수 없는 예를 너무 많이 봐온 터라... 그렇게 머리카락은 평등하지도 않았고, 아무리 노력 한다한들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어떤 손님은 앞머리에 곱슬기가 있어서 풍성해 보이는 게 싫다며, 너무 부풀어 올라 자꾸만 말아 올라간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손님은 앞머리가 너무 직모라 어쩌면 이렇게 볼륨이 안 생기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이었다. 그랬다. 거의 예외 없이 많은 손님은 내가 갖지 않은(갖지 못한) 그 반대편에 대해 갖고 싶어 했다. 왜냐면 본인들도 잘 알고 있듯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있고,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뀔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탓에 더욱더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카락이란 게 본인의 노력이나 선택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머리카락은 부모와 자녀의 혈연관계를 아주 직접 입증해 주는 물증인 셈이다. 그래서 헤어컷 하는 동안 조금 따분해하는 손님에게 '머리카락 색깔이 모계 쪽이에요, 부계 쪽이에요'라고 물으면 손님 대부분은 정말이지 할 말이 많았다. 우리로선 선뜻 이해가 안 가지만, 그들처럼 다양한 머리 색깔을 가진 세계에선 매우 당연하고 있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받은 손님은 우선 가장 가까운 직계가족의 머리카락 색을 얘기해주고, 어떨 땐 조부모에 대해서도 얘기해줬다. 왜냐하면 머릿결이며 머리카락 색깔이 윗세대에서 거슬러 내려와 후대에 나타나고 있으니까. 마이크는 밝은 블론디였는데, 그가 하는 말이 어릴 적엔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블론디였다고 했다. 20대가 되면서 이제야 노란빛에 가까워진 거라며 자신의 모계 쪽은 모두 자기와 같은 블론디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자기 남동생은 부계 쪽인 진한 갈색이라고 했다. 이렇듯 머리카락 색은 아주 과묵한 남자 손님도 수다를 떨게 만드는, 할 말이 많은 얘깃거리였다.
    

야디라는 웨이브 만드는 신제품을 90불에 사서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 
야디라의 머릿결은 타고난 직모였지만, 그녀가 아침마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웨이브를 넣어 스타일링하는 거였다.


내 머릿결이 반곱슬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됐다. 20대 때는 단발이건 긴 머리건 간에 스트레이트 파마가 오랫동안 유행이었고 그래서 미장원에 가면 모두 반지르르하게 스트레이트를 하고 돌아왔다.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이고 예쁜 거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스트레이트를 하고 얼마 안 가서 금방 구불거렸다. 그럴 때면 친구들도 너 머리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디서 했길래 이 모양이냐고 물었었다. 그 당시 나에겐 그 구불거림이 문제가 있는 것, 결핍으로 보였다.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아주 가느다란 곱슬머리였던 친구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프로-아프리칸 머리와 비슷했던 것 같다. 귀밑 2cm 단발머리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했던 학교 규칙 때문에(1980년 초), 그녀가 커트하고 학교에 오는 날이면 머리가 양옆으로 날개를 달아 올라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학교에선 그녀에게만 양갈래로 머리를 묶을 수 있도록 허락을 했었다. 그리고 그녀를 대학 가서 다시 만났을 때, 몰라보게 달라진 스트레이트 머릿결로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 웨이브가 몸서리치게 싫어서 과감한 투자를 했고, 때로는 머리가 심하게 손상되더라도 끝도 없이 스트레이트를 향한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고...


그렇게 결핍은 헤어스타일을 결정하는, 내부고발자와도 같다. 나이가 들어 하나둘씩 빠져가는 머리카락이 신경이 쓰여서, 특히나 윗머리가 듬성듬성하고 머리가 자라는 속도도 예전과 확실히 다른 걸 느끼게 되면, 헤어컷 스타일도 그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어제 온 손님의 머리스타일이 그랬다. 앞머리는 이마를 덮을 정도로 길게 뒀지만, 옆머리는 피부가 보일 정도로 바짝 짧게 깎았다. 하지만 이 과정을 지나 머리카락이 더 빠지면 머리 전체를 클리퍼 가드 0으로 깎기도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곳에선 민머리 스타일이 아주 많은 편이고, 또 살롱을 자주 찾는 손님 중의 하나다.


그녀는 머릿결이며, 머리숱이며, 뭐 하나 부족할 게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못 마땅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카렌의 머리숱은 어마어마했다. 뒷머리 안쪽으로 숱을 쳐내야 그나마 레이어링이 살아났다. 


스타일리스트는 이 손님 저 손님의 머리카락을 만져볼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해도 되는 직업이었다. 헤어컷 한지 불과 한 달만 지나도 머리는 덥수룩해지기 시작하고 곱슬머리에 숱이라도 많았다간 지난번에 했던 헤어컷의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숲으로 치자면 한여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올라오는 푸르른 잎사귀 같다고 할까. 머리를 깎다 보니 이젠 손님이 의자에 앉았을 때 커트한 지 얼마나 됐는지 맞힐 때가 있었다(그건 뒷목덜미, 구레나룻에 자라난 머리카락으로 금방 알 수 있다). 때로는 두 달 만에 아마존 밀림을 만들어 돌아온 남학생을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짜 머리 빨리 자란다고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스타일리스트가 되긴 됐구나 싶었다.

첫인상이 조금 깐깐해 보이는 손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너털웃음으로 편안한 손님도 있다. 어떻게 헤어컷을 할 것인지 상담이 끝나고 커트를 시작하면서 가능하면 손님이 편했으면 싶었다. 말을 안 붙이는 것이 때로는 손님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아, 그럴 때 내가 자주 말을 붙이는 방법은 손님의 머리카락에 대한 것이었다. 매우 당연한 걸 말하는 것 같겠지만, 일상에서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살롱만 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손님이 자신의 머리카락에 관해 얘기하는 사이에, 스타일리스트는 그 머리카락을 빗질하고 커트하고 있으니까. 머리카락이 몹시도 가늘고 직모인 할아버지의 머리를 빗으며 '가늘고 매우 직모네요'라고 말을 걸어도 손님은 할 말이 있었고, 또 아주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머리카락에 관해선 그만큼 잘 아는 이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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