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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Mar 11. 2019

흰머리를 왜 염색해야 하는데?

텍사스에서 미용사로 산다는 것은   23화


그레이트 클립스 같은 프랜차이즈점에선 65세 이상 시니어 손님에겐 2달러씩 할인을 해준다. 그러니까 헤어컷이 12불인 셈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흰머리가 많아도 염색을 안 하는 경향이 있어, 한창 젊은데도 언뜻 보면 시니어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사람 눈이 흰머리는 '나이가 들었다고' 인식됐는지, 마흔, 쉰밖에 안 됐어도 백발에 가까우면 언뜻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땐 손님들이 웃고 넘어가는 편이지만, 만약 이런 실수를 나에게 했다면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나 싶어 우울해하고도 남았을 텐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Photo by Wade Austin Ellis on Unsplash>


아침 시간에는 시니어 손님들이 정말 많이 살롱을 찾는다(특히 월요일 아침에는). 시니어 남자 손님들은 머리숱도 많지 않아 미안하게도 커트가 금방 끝나버릴 때가 많다. 정수리 부분이나 앞머리가 탈모가 되어 양쪽 옆머리만 남은 경우가 많았다. 귓가에 난 털이며 눈썹을 다듬어도 채 십 분이 안 걸릴 때가 수두룩했다. 연세가 80, 90세 된 분들이 헤어컷을 위해 운전을 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을 생각하면 좀 더 친절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날씨며 어스틴의 일상에 대해 두런두런 얘기하며 시간을 끌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뒤에 기다리는 손님이 있어 녹록지만은 않았다. 사실 몇몇 시니어들은 지팡이에 의존해 한 걸음 한 걸음 떼기도 힘들어하고 정말이지 살롱 의자에 앉기까지 아주 많이 힘들어했다. 더욱이 의자에 앉아서도 보청기, 안경, 때로는 이동식 산소호흡기까지 하나하나 떼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갓 뷰티스쿨을 졸업해 완전 새내기였을 시절에 가위 붙잡는 것도 부담 백배일 때, 시니어 손님들은 나에게 가장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줬다. 그 당시엔 클리퍼를 두상 가까이에 바짝 대고 밀어 올리는 것만 해도 혹시라도 손님 두피에 상처라도 날까 봐 숨죽이며 살살 밀어 올렸었다. 그런데 어떤 손님이 하나도 안 아프니까 팍팍 세게 해도 된다고 말해주는데, 정말이지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고마웠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손님들은 자기 몸에 닿는 촉감만으로도 스타일리스트의 경력이며, 어떨 땐 기분 상태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시니어 손님 중에 앤은 하얀 솜사탕을 얹어놓은 것처럼 흰머리가 한껏 부풀어 오른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는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스타일링하러 오는 나의 단골손님이었다. 난 그녀가 일흔 아니면 여든 정도 됐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어느 날 그녀가 96세라고 말하는데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살롱을 찾는 이곳 텍사스 사람들은 내가 보기엔 실제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편인데, 그녀의 경우는 정말로 의외였다. 어떻게 그 나이에도 저렇게 머리숱도 많고 보청기 하나 안 쓰는 청력이며, 꼿꼿한 허리를 유지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더욱이 운전까지 하면서, 슈퍼에서 장도 보고 매일매일 아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컬링 아이언으로 둥글둥글 말아 텍사스의 아름다움인 '빅 헤어'(Big hair,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볼륨)를 연출하기 위해 살롱을 찾기까지 하니... 그녀는 항상 남편 밥(Bob)과 같이 오는데, 밥은 그녀가 머리 하는 동안 잡지, 신문을 읽거나 손님들 머리 하는 걸 구경하곤 했다. 언제나 텍사스 남자답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서 인상 한 번 쓰지 않는 어린애 같은 얼굴이 늘 평온해 보였다. 그녀는 머리 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남편이 잘 있는지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오래된 습관 같기도 하고, 본능적인 관찰 같기도 했다.

한 번은 그녀에게 결혼생활이 몇 년 되었냐고 물어봤는데, 그녀가 깊은 한숨을 쉬더니 '그러니까 우리가 고등학교 때 만났고 동갑이니 벌써 70년은 넘었네' 그러는 거였다. 그 오랜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그녀는 머리 하는 동안에도 흘깃흘깃 남편을 쳐다봤고, 그러다가 또 어떤 날은 미워 죽겠다며 흘겨보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남편 밥의 헤어컷을 할 때가 있는데, 그는 한 번도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는데 지금은 오롯이 '무이 그랑데(Muy grande, 아주 크다)'라는 말만 계속해서 되뇔 뿐이었다. 이렇게 살롱을 찾는 시니어 중엔 남편이나 부인이 알츠하이머 증세가 있어서 어디를 가나 노부부가 손을 꼭 붙잡고 함께 들어오곤 했다.

 

바바라의 원래 머리카락 색은 밝은 갈색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은발에 가까운 밝은 색으로 탈색하는 걸 좋아했다. 


이렇게 시니어 부부가 함께 헤어컷을 하러 올 때 아주 흥미로운 것은,
부인이 남편의 헤어컷에 대해 아주 많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남편의 헤어컷이 시작되기 전부터, 끝난 후에도 부인은 남편의 머리가 잘됐다, 아니면 여기를 좀 더 짧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실제로 부인의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쳐야 하는 일이 허다했다. 마치 아이 머리 깎이러 온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대부분은 아주 짧게, 성가시지 않게, 더 자주 안 올 수 있는 헤어컷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하지만 그 반대로 남편이 부인의 머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별로 못 봤다. 딱 한 명, 부인이 시각장애인이었는데 남편은 부인의 헤어컷이 끝난 뒤에 아주 꼼꼼히 귀밑 길이며 앞머리 기장에 대해 괜찮냐며 하나하나 만져가며 확인해줬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부인이 집에 가서도 이것저것 하도 세심히 확인하는 통에 오랫동안 헤어컷 하러 같이 오면서 그 남편에게도 요령이 생겨서 그 자리에서 확인하게 됐다고 했다. 또한 흥미롭게도 보통 시니어 남자 손님들은 '어떻게 헤어컷을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대뜸 '와이프 마음에 들게 이쪽을 짧게 해 줘요'라고 말하곤 했다. 


헤어컷을 하러 오는 이유도, 헤어컷이 잘됐는지 최종적으로 결재를 하는 이도, 오롯이 와이프에게 있었다. 본인 머리카락인데도... 


그러면서 모두 하는 말이 와이프 마음에 들게 해야 세상이 행복해진다고 했다. 노부부가 서로 무심한 듯 보이면서 서로의 헤어컷을 기다려주고, 이런저런 말 없이도 어느 한쪽이 두 명의 헤어컷을 계산하는 모습에서,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들만의 단단한 공동체가 느껴졌다.    



시니어는 물론이고, 나이가 젊어도, 여간해선 염색을 안 하는 경향이 있다. 간혹 흰머리가 싫어서 슈퍼에서 염색약을 사다가 본인이 직접 하거나 부인이 해준다는 손님은 봤지만, 아주 드물었다. 흰머리가 마구마구 늘어나는 40대, 50대의 머리를 빗으로 쓸어 넘기면 갈색, 붉은색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어우러져 아주 멋스럽다. 사람마다 흰머리가 나는 위치가 다 달라, 골고루 잘 섞여 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앞에만 집중적으로, 혹은 옆에만, 이런 식으로 다 달랐다. 손님들은 본인 머리라도 보통 앞면, 측면, 뒷면을 따로따로 보게 되지만, 스타일리스트들은 머리를 빗다 보면 사방에서 볼 수 있어, 흰머리의 흐름이 한눈에 보인다. 그러다 보면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도 보이고, 석양도 보인다. 마치 퇴적암, 운석에서 수많은 시간 동안 층층이 쌓여나간 자연의 빛깔처럼, 머리카락에도 그런 경이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반면에 많은 아시안은 흰머리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도 3~4주에 한 번씩은 쏙 돋아 올라오는 흰머리가 싫어서 뿌리 염색을 하고 있지만, 할 때마다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언제나 되어야 살롱을 찾는 손님들처럼 나의 흰머리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마음의 준비가 생길는지... 이미 몸은 노화가 시작되어 흰머리가 반을 덮었는데도 아직 마음으론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고 하면 너무 철이 안 든 걸까.

여하튼 흰머리를 그냥 방치하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어떨 땐 자기 관리가 안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인식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곳에선 흰머리가 나도, 염색을 하건 안 하건 간에 강요하지 않다 보니, 이렇게 흰머리 염색에 집착하는 것 또한 내가 성장해온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예전에 한국에서 딸아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릴 때 한 아이 엄마가 유독 흰머리로 다녔는데, 아직은 젊은데 왜 염색을 안 하고 다닐까 궁금했었다. 나중에야 그녀가 염색만 하면 살갗이 빨갛게 돼서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아시안이 염색을 선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짙은 머리카락 색 때문일 것이다. 검은색 머리 뿌리에서 하얗게 밀고 올라오는 흰머리는 그야말로 강렬한 흑백의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이 이민 생활을 오래 한 교민일수록 같은 아시안인데도 염색을 안 하고 흰머리 그대로 자라게 둔 사람들이 많았다. 흰머리는 나이가 듦에 따라 멜라닌 색소의 부족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건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의 정서엔 흰머리를 반갑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어느 누가 늙어가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냐만. 염색약이 해롭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임에도, 염색을 멈출 수 없는 것은 본인 스스로 거울에 비춰봤을 때 좀 더 흰머리가 없었던 과거에 머무르고 싶어서일 것이다. 이젠 머지않아 굳이 염색할 필요 없이 모공을 통해 흰머리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또한 원하는 모발의 색상을 주입할 수 있다고 한다니, 그 변화가 어떨지 궁금해진다.


<Photo by Kevin Grieve on Unsplash>


시니어 여자 손님은 까다로웠다. 말할 수 없이...


아주 많이 그랬다. 시니어처럼 남자 손님과 여자 손님의 성향이 이토록 극명하게 다를 수 있을까. 시니어 남자 손님이 백 명에 다섯 명 정도가 까다롭다면, 시니어 여자 손님은 거의 모두 그런 듯싶다. 그런데다 시니어 여자 손님의 눈은 꼭 살롱 위생점검 나온 인스펙터의 눈빛처럼 매섭다. 그녀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왔거나, 아니면 살롱에서 기다리는 동안 어느 스타일리스트가 잘하는지를 관찰했다. 그녀들이 의자에 앉는 순간, 아니 체크인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머리를 이렇게 해달라고 주문할 땐 정말이지 아주 귀 기울여 새겨들어야 했다. 

"여기 이 머리는 컬링 아이언으로 웨이브를 만들 거니까, 너무 짧지 않게 해 줘요."

"손가락으로 쓰다듬었을 때 이 정도 길이가 난 좋아요." 

더욱이 자신에게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무게감에 대해 얘기하는 손님도 있었는데, 사실 이 대목은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 그녀 자신만이 측정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라 조금은 어려운 대목이었다. 몇 번 깎아봤다면 손님의 취향을 짐작해볼 수 있지만, 맨 처음에 온 손님이라면 헤어컷 상담할 때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땐 영어가 모국어인 스타일리스트들이 매우 유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술이 좋더라도 손님의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부분까지 보듬어 헤어컷에 대한 안정감, 믿음을 줘야 한다면... 무엇보다 딱 부러지는 수치로 '이만큼 잘라줘요'라고 소통하기보다는 머리를 잘랐을 때의 그 느낌이, 레이어링 된 질감이, 그녀가 헤어컷의 원형으로 삼고 있는 모델이 그 옛날 영화배우일 수도 있었으니까.

이렇게 시니어 여자 손님들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헤어컷을 해오면서 자신이 원하는 기장이며 스타일이 어느 정도 확고하게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니어 헤어컷에선 스타일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지만, 대신에 거의 완벽하게 지난번과 똑같은 스타일과 기장을 만들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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