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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eon Jan 26. 2021

해변에서

공부, 과학, 연구, 나의 미래에 대한 개인적인 글

3월부터 카이스트 대학원에 간다. 여름에 결정을 하고 나서 자대는 그냥 지원도 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는 남겨뒀어야 하나? 그러나 살면서 7살 때 바둑학원을 그만둔 것을 포함해서 내가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거의 없다. 정말 최선의 선택만 한 것인지 고도의 합리화 능력을 발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취업도 많이 했고, 석사 졸업을 한 친구도 있고, 의, 치대를 간 친구들은 이제 병원에서 일하고 있고, 무엇보다 벌써 친구들 몇의 이름이 실린 논문이 나오는 것을 보면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그동안 나는 딴 짓을 많이 했다. 전문연으로 대학원을 일찍 가는 대신 공익근무를 하면서 친구들과 놀거나 책만 실컷 읽기도 했고, 음악을 한다고 휴학하기도 했다. 입학해서 2년을 다니고, 3년을 통으로 쉬고, 다시 2년을 다녀서 초과학기 하나 없이 7년만에 졸업을 하는 셈이다.


3년의 분절 때문인지, 첫 2년과 마지막 2년의 공부는 내게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과학고를 나왔기 때문에 솔직히 1, 2학년 때는 공부가 정말 만만했다. 일반생물학, 일반화학을 배우고 왔고, 실험도 꽤 해봤고. 설렁설렁 해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다. 노느라 정신없었던 시간들이었다. 2019년에 다시 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모여서 놀던 26동 건물이 사라지고, 강의실은 모르는 후배들로 가득 찼고, 학교는 더 이상 나를 위한 놀이터가 아니었고 그보다는 좀더 학원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복학 첫 학기에 들은 과학철학의 이해가 공부에 대한 내 관념을 뒤엎어 놓았다. 물론 수업에서 다룬 흄의 회의론이나 포퍼의 반증주의, 쿤의 정상과학 개념 모두 내가 과학 활동이란 걸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김영 교수가 '공부'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과철이 시험은 모조리 빈칸 채우기였다. 그 말인즉, 나눠주는 백여 페이지 프린트의 중요 부분을 전부 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공부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처음에는 저급한 시험문제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되돌아볼수록, 공부는 정말 이해하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증명을 빈 종이에 옮겨 써보고, 배운 것을 굳이 다시 노트에 정리하고, 책 뒤의 연습문제를 풀며, 패러다임을 체화하는 것이었다.


국가대표로 뽑히고 나서 IBO를 준비할 때가 내가 살면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했던 때였다. 그때 나는 옷방에 틀어박혀서 IBO 홈페이지에 공개된 십몇여년간의 필기 문제를 거의 다 풀었다. 출국할 때쯤엔 실험만 완전히 망치지 않으면 쉽게 금상을 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는데, 막바지에 풀었던 회차들에서는 커트라인을 훌쩍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이해'에서 나오는 능력이 아니었고, 그 문제들을 둘러싼 일반생물학의 내용들과 그것들이 문제에 적용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체화'를 통한 습득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학부생 동안 만났던 수많은 과외돌이들에게 생물학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개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고, 그들이 직접 풀어내야 하는 숙제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과외를 하면 결과는 정해져 있다. 잘하는 아이들은 알아서 잘 해내고, 기본이 좀 약하거나 게으른 아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과외선생이라면 나보다는 좀 더 결단력 있고 계획적이고,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이 어떤 공부들을 체득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하는 것이다.


연구실에 가기 전에 되는 대로 분야의 관련 논문을 읽고 있다. 예전에 심포지엄에서 논문을 읽을 때는 저자가 실험 결과를 통해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에는 논문을 좀 더 꼼꼼히 읽고 있다. 핵심 주장뿐만 아니라, 저자들이 왜 이러한 대상을 가지고 이러한 접근법으로 실험을 했는지, 그들이 암시하는 자신들의 헛점과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에둘러 변호하고 있는지, 이 연구실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하려고 신경쓰다 보니 논문 하나를 읽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해서 그 분야를 통째로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름 공부를 많이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연구자로써는 아직 첫 발도 내딛지 않았다. 학문 전체가 바다와 같다면, 학부때는 주로 해도(海圖)를 익히는 정도, 지금은 해변에서 몸에 물을 뿌리며 준비운동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바다는 깊은 해구(海溝)들이 잔뜩 있는 곳이며 연구를 하려 바다에 뛰어든 많은 이들이 그 깊은 구덩이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 그 깊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공부란 건 지수함수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깊어 보여도 계속하다 보면 그 수압에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조바심 역시 이렇게 생각하면 덜어낼 수 있다. 나에 비해 벌써 너무 많은 것을 해낸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같은 과정을 거쳤으리라는 것이며, 내가 시간적으로 그렇게 뒤쳐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공부의 지수함수 그래프에서 큰 차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보다 바다에 발을 담그려는 지금 드는 유일한 걱정은 내가 잠수하려는 곳이 내가 정말 살고 싶은 곳일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고민이 드는 것은 아직 내가 다른 구덩이를 택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물학에서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들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 원시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생겨나 지금에 이르렀는가? 둘, 의식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셋, 우주에 외계생명체가 있는가? 있다면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같거나 혹은 다를 것인가, 이 우주에는 어떤 형태로 의식을 가진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 첫째는 온전하게 밝히기도 힘들뿐더러 하다가는 굶어죽기 딱 좋은 질문이라 포기했고, 셋째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둘째 역시 인간이 과학 활동을 통해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결과물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며 많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되고 있는 주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가장 추구해볼 만한 질문인데, 내가 가려는 연구실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도 아마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선은 그래도 분야가 충분히 매력적이고 최신 동향에 잘 맞아떨어지며, 좋은 논문을 써서 박사를 딴다면 내게 다시 다양한 선택지가 열릴 것이고, 연구실의 교수님과 사람들이 충분히 마음에 들고, 뛰어난 동료를 한 명 알고 있으며, 나는 과학 활동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해로운 것, 해로운 사람들을 판별하는 촉은 그렇게 좋지 않다. 타인의 행위를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는, 긍정적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유약하고 위험한 편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게 좋은 것, 좋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능력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생에서 늘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입장이라면, 좋은 걸 찾아내는 능력이 더 유용한 게 아닐까? 적당히 좋은 것, 좋은 사람들을 찾아내서 거기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면 후회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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