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는 사람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특정된 틀속에 갇혀버리면 영화가 말하는 표현은 제한된다.
영화는 다양한 생각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특정한 명칭을 부여한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윤희에게’는 둘의 관계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겪은 고통을 보여주고, 인물에 이해관계를 입체적으로 표현해준다. 그리고 사회 부조리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특별한 사랑을 경험한 두 여자, 그들의 중년이 된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서정적인 아름다움 보다, 현실 속 냉혹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윤희(김희애)와 쥰(나카무라 유코)의 사춘기 시절 사랑했고, 중년이 되서도 서로 잊지 못한다.(쥰은 애틋함, 윤희는 외로움) 그리고 각자 다른 상황으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초반 영화는 어두운 색감을 그려내지만, 중간부터 따뜻한 색감을 그려낸다. 한국에서 피했던 삶을 일본에서 부딪치면서 자아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동성애'를 부적절한 관계로 생각했을까?>
‘부적절’은 생물학적 모순이 아니라, 문화적 모순이 아닐까? 오랜 시간 특정 집단에서 정한 생각을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피엔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동물 세계에도 동성애는 자연스럽다. 문화적 관점에서 자연스럽지 않지만, 생물학적 관점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럽다. '동성애’는 한자 사랑 '애가' 들어갔다. 아직까지 사회에서 동성애는 불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데 사랑을 자연스럽지 않다는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사랑에는 죄가 포함되지 않는다.(사랑으로 인해 또 다른 폭력이 생긴다면 그것은 죄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한테는 돌을 던질 수 없다. 현대판 '돌'은 언어폭력이다. 미세한 다름이 그들한테 돌을 던지는 권리가 될까? '응원, 인정, 동정' 세 가지 키워드는 필요 없다. 자연스럽게 내가 아내를 사랑하듯,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또 다른 자연스러운 사랑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 때문에 자신의 삶이 무너진 윤희(김희애)는 없을 것이고, 옆에 잠시 머물러 인생이 무너진 인호(유재명)도 없을 것이다.
엄마의 과거 삶을 어슴푸레 알게 된 새봄(김소혜)은 외삼촌을 찾아가서 과거 삶을 묻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따뜻함 보다는, 걱정이라는 폭력적인 긴장감만 느낄 뿐이다. 가족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벼랑 끝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윤희는 진정한 자신에 삶을 살지 못한다. 사랑조차 사회가 정해놓은 틀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삶을, 그것은 오히려 부조리한 것이라 감독은 말하고 있다.
새봄은 부모가 이혼을 할 때, 엄마를 따라온 이유는 윤희한테 외로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상실감이다. 윤희는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둡고, 피로감이 가득하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인생에 대한 무력감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의 삶을 무너뜨렸기에 타인이 자신이 쳐놓은 선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담배를 피울 때조차 타인을 의식하는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왜 이혼했냐는 새봄에 질문에 "너희 엄마는 사람을 외롭게 한다." 답했던 인호는 새로운 삶을 얻었고, 그 삶을 알리기 위해 윤희를 찾아온다. 청첩장을 건네는 순간 윤희 얼굴은 이제껏 살아온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줄 수 없었던 사랑을, 그것을 너무나 갈구했던 불행한 한 남자에 대한 미안함이다. 진심 어린 축하에 인호는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눈물은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났지만,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족의 강제로 선택된 삶이, 잠시나마 가족이었던(인호) 사람의 삶을 무너뜨렸다. 윤희의 삶도 마찬가지다. 가족들은 무엇을 바란 것일까? 옳다고 생각한 신념이 과연 옳았을까? 영화를 바라보고 있는 나도 생각을 하게 만든다.
쥰은 자신이 원했던 삶을 쟁취하지 못했다. 20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윤희를 그리워 하고 잊지못한다. 그녀가 읽어내려가는 편지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얼굴은 희미하게 슬프지만, 윤희와 다르게 완전한 상실감은 보이지 않는다. 이유는 가족에 있다. 용호(윤희 오빠)는 끝내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폭력을 저지르지만, 마사코(쥰 고모)는 조카를 이해하고 평생을 옆에서 보듬는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란 쥰은 완전한 상실감 없이 희망을 품고 산다.
<자아를 이해받을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은 삶이 아닐까? 나아가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윤희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었다. 반대로 쥰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 거부한다. (자신한테 고백을 시도하는 여성을 냉정하게 거부한다.) 가족한테 이해를 받지 못한 윤희는 가족이 탄생했고, 가족한테 이해를 받은 쥰은 과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가족이 정해준 삶을 살고, 새로운 가족이 생겨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면 상실된 삶은 되돌릴 수 없다. 윤희(가족이 있는)와 쥰(가족이 없는)의 삶은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은 ‘상실’이다.
이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감독은 관객한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랑에 있어서 옳고, 그름은 존재하는가? 조건 없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타인이 부정할 때, 그것은 옳은 것일까? 국가와 사회는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원한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조금 특별한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부정한다. 사랑은 국가가 생기기 이전 태초부터 발생되었다. 서로 사랑하고, 평생을 함께하는 것에 어떠한 사람도 돌을 던질 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삶이고,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다. 권리를 인정하고,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인호와 새봄같이 고통받는 사람은 생기지 않는다. 불편한 생각과 시각은 강요가 된다. 그 강요 때문에 사랑하는 둘외 다른 고통받는 사람이 생긴다. (쥰과 윤희의 고통은 인호와 새봄한테 이어진다.)
<줄거리>
어린 시절 서로 사랑했던 윤희와 쥰은 가족들의 강압적인 행동 때문에 헤어진다. 한국에 남은 윤희는 결혼을 하고, 일본으로 넘어간 쥰은 홀로 지낸다. 원하지 않았던 결혼은(평범하게 살고 싶은 거짓된 마음) 결국 파경을 맞는다. 새봄(딸)과 함께 사는 윤희는 삶이 따뜻하지 않고, 차갑다. 일본에 지내는 쥰도 마찬가지다. 예의 바른 얼굴이지만 외롭고 차갑다. 쥰의 고모가 결심한 행동 때문에 그들의 삶이 변화된다. 둘은 가족 때문에 헤어졌지만, 가족(새봄, 마사코) 덕분에 일본에서 다시 재회한다. 늦었지만 자신들의 인생을 되찾는 여정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