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서 '허세'가 빠지면 무엇이 남는가

70년대 양장점의 투쟁부터 오늘날 '병맛'이 주는 지루함에 대하여

by 유수연

#1. 메두사, 시선에 목숨을 건 스노비즘의 기원


신화 속 메두사는 허영의 대명사로 인용되곤 합니다. 자신의 미모를 과시하다 아테네의 저주를 받은 그녀는, 시선이 마주치는 모든 이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괴물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패션은 이 '메두사적 스노비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지 않고는 생명을 잃는 것, 시선을 즐기고 그 위에 군림하며 죽고 사는 것. 오늘날의 트렌드 세터들은 어쩌면 현대판 메두사의 본능을 이어받은 존재들이다.

"착하고 순종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극한의 아름다움과 공포는 통한다."


이것이 패션 명가 '베르사체'가 메두사를 브랜드의 상징으로 표방한 이유이기도 하다.

#2. 경성의 모던 걸: 투쟁으로서의 패션


1920년대 경성의 거리를 상상해 봅니다. 당시 신여성들은 '전차 안에서 화장하는 여자'라는 조롱을 받으며 미디어의 신랄한 비판을 견뎌야 했다.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시대에 자기표현이 확실한 여성들은 '극혐'의 대상이었다. 70년대까지도 양장점은 사회 5대 악으로 공격받았고, 멋을 부린다는 것은 사방에서 꽂히는 시선을 온몸으로 감수해야 하는 '러시안룰렛'과 같았을 게다.


그러나 그 고독한 패션 천재들의 '독기' 어린 도전이 오늘날 K-패션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들에게 패션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3. 악녀(Villain)가 이끌어온 역설의 미학


패션은 언제나 시대에 순응하는 공주님보다, 파격을 일삼는 악녀들에 의해 발전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디즈니의 빌런들: 크루엘라, 말레피센트, 우르술라는 펑크록과 젠더프리 룩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대를 바꾼 아이콘: 무성영화의 테다 바라부터 80년대의 마돈나까지, 치명적인 유혹의 '뱀프(Vamp)' 스타일은 현대 뷰티의 원형이 되었다.


이들은 결핍과 질투,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기꺼이 즐기는 스노비즘을 동력 삼아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디즈니 영화의 악녀중 하나 영화 크루엘라



#4. '병맛'의 시대: 허세와 독기가 사라진 자리의 유희


완벽함과 권위가 지배하던 패션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정장 아래 기괴한 발가락 슈즈를 신고, 앞머리에 헤어롤을 감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MZ세대에게 패션은 이제 '놀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 맥락 없는 부조화에 '병맛'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완벽하게 관리된 몸매와 피부를 히든카드로 내세워, 대책 없이 막 나가는 스타일을 즐기는 '꾸꾸꾸(꾸미고 또 꾸미는)'의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워진 만큼 패션은 심심해졌다. 스노비즘이 사라진 자리에 '재미'는 남았지만, 과거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찾기 어렵다.


#5. 패션은 '기품'과 '허세'가 필요하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Dress Classy, Dance Cheesy(옷은 품격 있게, 춤은 저렴하게)"라는 명확한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기품 없는 허세만 부렸던 캐릭터들은 대중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욕망은 같아도 튀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트렌드의 전체주의는 사라지고 패션도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바뀌어 가는 시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일까? 패션에는 스노비즘과 독기가 빠졌으며, 뷰티와 인테리어 관련 전시회마다 한층 보들보들해지고 야들야들해진 모습들로 평화롭다 못해 지루할 정도다.

내년도 봄여름을 겨냥한 디자이너 컬렉션들도 특별한 충격이나 파격보다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위안의 메시지 발신에 한창이다. 간혹 '병맛'이 등장했다 해도 예전의 스노비즘처럼 독기는 없다. 모두가 삶과 환경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착한 이미지로 궤도 수정 중이다.


스노비즘이 사라진 지금, 패션은 꿈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우리를 꿰뚫어 보던 메두사의 강렬한 눈빛, 그 독하디 독한 패션의 광기의 시대가 그리워진다. 결국, 패션을 가장 패션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약간의 기품과, 그보다 더 진한 '독기' 어린 스노비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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