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실직 이야기 6.

그날이 왔다

by 늘날생각해

나는 프리랜서다.

프리랜서로 한 회사에서 10년을 일하고

오늘 퇴사했다.


곧 퇴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날부터

오늘까지의 감정 변화는 이랬다.


첫째 주.

꿈꾸는 것처럼 멍했다.

관자놀이까지 식은 땀이 흘렀다.

그렇게 되었구나, 인정한 뒤 신이 났다.


둘째 주.

휴식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

총알 다 떨어졌는데 잘 됐다.

아이디어 기근 상태였는데 잘 됐다.


셋째 주.

불안감이 밀려왔다. 심장이 두근댔다. 어지러웠다. 하루정도.

신이 났다.

한번도 짜 본 적 없는 버킷리스트가 떠올라, 신이 났다.

실업 급여 받을 생각에, 신이 났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가 줄어들 거란 생각에, 신이 났다.




감정 변화의 범위가 생각보다 작았다.

분노, 짜증, 기쁨, 환희, 애처로움, 아련함, 해방감, 불안, 초조, 긴장 등

다양한 감정이 변덕스럽게 오락가락 할 것 같았으나

의외로 나의 감정은 하나의 기조를 유지하며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신난다, 라는 일관된 감정 말이다.


그 신나는 감정은 오늘 절정에 달했다.

전날 밤, 작업물을 메일로 보내며

항상 무뚝뚝하게 비워놨던 메시지 란에

덕분에 즐거웠다는, 스윗한 말을 남기며 신이 났고,

준비해간 커피를 선물하며 신이 났고,

손편지와 얇고 가볍고 가치 있는 상품권 선물을 받으며 (가장) 신이 났고,

돈까스에 맥주로 점심을 먹으며,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2인과

무자격증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1인이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커피 얘기를 하는 것이 신이 났고,

나와 같은 날 퇴직하시는 인연 깊은 부장님과 인사를 나누며

우린 퇴직 동기-라는 말을 할 수 있어 신이 났다.


그 밖에도

집 근처에 사는 동료에게

이제 집 근처에서 보자며 깔깔거렸고

나와 함께 퇴사하는 같은 직군의 동료와 포옹을 한 채로

귓속말로,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하며 꺄르륵거렸다.




나의 퇴사 날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전반적으로 신이 나 있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다들, 어떡해요- 어쩜 좋아- 어휴-

한숨 쉬며 안쓰럽게 바라본다면

정말 질색이었을 듯한데 분위기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아

만족스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보고 싶은 사람 둘에게 전화를 걸어

들뜬 목소리로 나의 괜찮음을 알렸고

얼굴을 보지 못한 한 명에게 톡으로

자리 잘 지키고 있으라는 덕담을 남겼다.


오늘 나와 작별 인사를 나눈 사람 약 15명.

끝내 나는 피곤했고

집 생각이 간절했다.


어쩌다 보니 무척이나 길어진 작별 인사 퍼포먼스를 마치며 드는 생각은,

이승을 떠나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혼령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유난히 신났던 나의 하루는

나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느끼며

마무리되었다.

결혼식 끝내고 신혼여행 떠날 때처럼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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