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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Aug 10. 2022

캔터베리 이야기 (상)

제프리 초서


우리는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지만, 곧잘 길을 잘못 들어선다.

(p66)



아주 오래 전부터 한번은 읽어야지했던 책이다. 많은 핑계로 밀어놨던 제프리 초서의 책을 기회가 닿아 읽는다. 여러 선입견으로 나름 긴장하며 책을 펼쳤는데,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한마당이다.








4월이 되면 여러 나라의 순례자들은 그들이 아플 때 도와주었던 거룩하고 복된 순교자를 찾기 위해 영국의 캔터베리를 향해 길을 나선다. 화자 역시 캔터베리로 순례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서더크 지방의 타바다라는 숙소에 묵게 되었는데, 밤이 되자 스물아홉 명 정도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또한 모두 순례자로서 캔터베리로 가는 길에 운연히 만나 동행하게 된 사람들이다. 기사, 수습기사, 수행원, 수녀, 신부, 수도사, 대학생, 변호사, 시골 유지, 잡화 상인, 목수, 직조업자, 염색업자, 태피스트리 제작자, 선장, 의사, 귀가 약간 먼 어느 부인, 장원 감독관, 방앗간 주인, 법정 소환인, 면죄부 판매인, 식품 조달업자, 청지기 등 직업도, 신분도, 살아온 환경도 다양하다. 


숙소 주인은 그곳에 머무는 손님들에게 순례길 동안 그들을 즐겁게 해줄 게임을 제안한다. 그 제안이란 캔터베리로 갈 때 두 개, 돌아오는 길에 또 두 개씩 각자 가장 교훈적이면서도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1등을 한 사람에게는 동행했던 순례자들이 돈을 모아 마지막날 저녁을 대접한다. 숙소 주인은 이 순례에 동참해 안내자를 자처하고, 모든 이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이제 그들의 유쾌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상권에서는 법정 변호사, 어느 부인, 수사, 법정 소환인, 대학생, 상인, 수습 기사, 시골 유지가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고대 아테네가 등장하기도 하고,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해학 넘치는 소동극이 펼쳐지기도 하며, 몽골의 사막, 그리고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지기도 한다. 서술자들만큼이나 다채로운 이야기들이다. 


부정부패, 사랑과 질투, 삶의 모순, 매순간 우리에게 던져지는 딜레마, 한 치 앞을 모르면서도 부질없는 탐욕과 욕정으로 다투며 제 발등 제가 찍는 인간의 어리석움, 노년의 회한, 당시 여성들에게 강요되어진 인내와 순종 등을 해학과 풍자로 유쾌하게 써내려갔다. 읽다보면 우리나라의 옛이야기를 읽는 듯한 기분도 드는데, 아마도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는 교훈적인 메세지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다. 육체와 정신의 족쇄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 사랑은 위대하나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꺼지지 않는 허세, 거짓말, 분노, 탐욕 등 네가지를 들면서 노년이 갖는 어리석음은 미래가 아닌 지난 과거에 연연하는 것, 인생사 뿌린대로 거둘 것이니 잘 뿌리며 살라는 것 등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는 <법정 변호사의 이야기>와 <바스에서 온 어느 부인의 이야기> 서문, 그리고 <대학생의 이야기>다. 


먼저 <법정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콘스탄스를 미워하고 위기로 몰아넣는 술탄의 모후들이 악마 혹은 악의 뿌리로 표현되는데, 이는 지극히 기독교적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콘스탄스를 사랑했던 술탄왕과 이교도(기독교도 입장에서)들은 개종하지만, 두 모후와 콘스탄스를 욕망했던 젊은 기사는 개종하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기독교도들과 개종자들을 학살하고 콘스탄스가 3년간 바다를 떠도는 과정은 박해와 순교를 상징하는 듯 보인다. 콘스탄스의 남편은 이교도였지만, 개종자다. 즉 기독교도가 아닌 사람은 모두 신이 버린 악마와 다름없다는 얘기다. 또한 연약한 콘스탄스가 건장한 남자를 상대로 몸싸움에서 이겼다는 설정이 상징하는 것, 신의 전능함을 부각시킨다. 그야말로 지극히 기도교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가 십자군 전쟁 이후 세대임을 감안하면 납득할만하다.


<바스에서 온 부인 이야기>에서 부인은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해도 되나싶을 정도로 노골적이다. 가정내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기득권에 대해 비판과 가정 및 사회에서 여성이 가져야할 당연한 권리에 대해 호탕하게 주장하는데, 아이러니는 서문의 마지막에 있다. 네 번이나 결혼하고, 스무 살 어린 남자와 다섯 번째 결혼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으로 끌고가지만 정작 결혼 이후에는 남편의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는 점이다. 부인의 개인사를 통해 당시 여성에게 있어서 결혼이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연장선으로 부인의 본격적인 이야기에서는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주도권과 남편의 통제권을 주장하는데, 읽으면서 통쾌함을 느끼기도.


<대학생의 이야기>에서는 순종의 끝판왕이 등장한다. 아내를 시험하는 후작의 작태는 어처구니 없는데, 초서는 이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결혼한 남자들에게 그리셀다 같은 여자는 절대 없으니 자기 아내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아내들에게는 겸손 때문에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일은 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또한 여성들에게 침묵하지 말고 말대꾸를 하고, 순진해서 속지 말고, 적극적으로 지배권을 잡으라고 충고하는데, 결정적으로 남자들이 기분 나쁘게 할 때 참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내가 이렇게 맛없이 썼지만, 초서는 상당히 맛깔나게 썼다. 


상권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골 유지의 이야기>는 조금 씁쓸하다. 아내의 정절보다 약속을 더 중요시 여기며 아내가 한 약속을 지키라고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내는 아르베라구스, 도리겐을 가엾게 여겨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약속을 무효화해준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의 고귀한 행동에 감동받아 채무 비용을 면제해준 천문학자. 화자는 이들 중 누가 가장 관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들의 관대함에 도리겐의 의견은 없다. 도리겐의 입장에서 애초에 이들이 관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은 나의 입장에서 흥미로웠을뿐,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외의 이야기들이다.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박지원의 <양반전>, 동화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 애니메이션 <슈렉> 등이 떠오를만큼 발랄하고 유머러스한 소동극들이 입가를 끌어올려준다. 하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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