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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21. 2022

마틴 에덴

잭 런던


너는 누구야, 마틴 에덴? 



하층민 노동자로 거친 생활을 해왔던 스물 살의 마틴은 우연히 불량배와 시비가 붙은 아서를 도와주고 초대를 받아 간 그의 집에서 해박하고 지적이며 아름다운 아서의 누나 루스에게 단번에 매료된다. 루스 또한 자기가 속한 계급에서는 보기 어려운 야성미를 가졌으며 비록 우아함과 단정함은 없지만 잘난 체 하지 않는 순수한 마틴의 모습에서 야릇한 욕망과 끌림을 느낀다.







잭 런던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알려진 이 작품의 1권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주인공 마틴 그 자체 만큼이나 격렬하고 열정적이고, 곳곳에 상징적 의미를 지닌 요소와 상황이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먼저 소설 도입부. 초대를 받고 간 아서의 집에서 본 그림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낌이 달라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마틴은 마치 누군가 자기를 속인 것처럼 화가 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데, 읽을수록 이 상황이 전달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교양있고 고결해보이기만 했던 상류층 사회에 가까이 갈수록 드러나는 모순과 허위, 독선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리고 초반부의 '손'은 계급의 격차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손에 대한 첫 언급은 식탁에서 루스가 마틴의 손을 보고 건넨 말이다. 집에 돌아온 마틴이 루스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는 부분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손은 다시 언급된다. 더할나위 없이 부드럽고 매끈하며 하얀 손을 가진 루스, 자신 뿐만 아니라 여공과 노동하는 여자들, 그리고 누나 러투르드의 손은 상처와 굳은살 투성이고 심지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노동을 해 본 적이 없는 손과 노동만 해 온 손의 차이는 사회적 신분의 간극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읽을수록 마틴이 사랑한 건 과연 루스였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본 적도, 가까이 다가가 본 적도 없는 루스는 이성이기 전에 사회적 계급을 의미한다. 아서와 루스를 만나기 전에는 애초에 자신의 무식과 거친 생활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마틴은 모스 가를 방문한 이후 처음으로 거울을 보며 자신을 응시하고 각성한다. 마틴은 문법 공부를 하고, 시와 예절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자기 계급의 사람들을 일절 만나지 않는다. 독서를 할수록, 루스를 만날수록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살았는지 깨달으며 확장된 세계에 스스로 놀라면서 학문적 지식이 깊어지는 것과 비례해 상류층 계급으로 올라서고 싶은 욕구는 점점 더 강렬해진다. 


마틴은 루스와 동등해지기 위해서 유명해지고 싶다. 그는 장래에 작가로 성공해 부유해진 자신, 가족이 된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시를 낭독해주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러한 대목은 마치 루스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촛점이 루스에게 맞춰져 있는 듯 보이지만 루스의 세계인 상류층 진입이 더 크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루스는 어떤가.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그동안 접해본 적 없는 캐릭터인 마틴에게 급진적으로 관심을 갖는데, 그를 원하는 이상형으로 만들어 가는데 짜릿한 성취감을 얻는다. 대학에서 문학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은 루스가 마틴에게 그동한 써온 글을 보여달라고 청하자 몇 편의 단편소설과 시를 보여주는데, 루스의 평가는 '미숙하다'였다. 마틴의 단편소설을 읽고 추잡하고 끔찍하다는 평을 하는 루스는 왜 점잖은 주제를 선택하지 않았느냐며 분개한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말한 '추잡함'이란 그동안 마틴이 살아온 삶이었다. 


상류층 사회에서 단 한발자국도 벗어난 본 적이 없는 루스가 갖는 한계는 매 상황을 달리하며 보여진다. 그녀는 마틴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당신은 왜 물려받은 수입원이 없나요?"라는 질문을 한다든가, 학교 수업비를 가족에게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등 마틴의 입장에서 전혀 현실성이 없는 얘기만을 순진무구하게 늘어놓는다. 고된 노동으로 육체적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 노동자를, 일을 하는데도 돈이 없는 하층민의 삶을, 연인에게 있어서 가난은 한때의 낭만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루스는, 이 모든 것을 전혀 모른다. 


루스는 마틴을 하층민에서 상류층으로 성공한 인사들에게 투영하면서 그와 함께 장미빛 미래를 설계한다. 마틴에게 전하는 루스의 조언은 대체로 교육과 훈련이다. 예술을 보면서 감흥받는 것조차 훈련의 성과라고 말하고, '가난'에 대해서는 사전적 의미로만 알고 있으며 어쩌면 가난이 성공으로 도약하는 박차라고 생각하는 루스에게서는 자기가 속한 계급 이상의 것을 이해하려는 의지는 없다. 그녀는 마틴을 주무르는대로 만들어지는 점토라고 여겼다. 





점점 더 많은 지식을 쌓아가고 글을 쓰며 향상되어 상류층에 가까워져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는 마틴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문한다. 이념이나 사조에 종속되지 않고 양쪽 계층을 모두 관조하며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분야에 관계없이 지식을 흡수하면서 동시에 축적한 정보들을 상호 연계해 사유하고, 여기에 보태지는 현실적인 부조리한 하층민의 삶은, 그에게 글을 쓰는 재료가 되어준다. 


상류층을 동경하지만 하층민의 삶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마틴의 이중성과 모순도 보인다. 자기가 사는 세계 외에는 무지에 가깝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루스의 오류를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은 놓지 않는 마틴은 오페라를 관람한 후 루스에게 성악가의 목소리에 감탄하면서도, 음악을 망쳤다고 얘기한다. 그 이유는 그토록 뚱뚱하고 못생긴 두 주인공이 연기하는 사랑에 이입되지 않았고, 너무 비현실적라는 것이다. 마틴은 오페라의 모순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사사건건 거의 대부분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비판하는데, 정작 자신도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작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마틴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을 곳곳에 심어놓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부분도 재미있는 게 마틴은 아직 상류층에 진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층민들과 다르다고 인식한다는 점이다.






마틴의 독학과 지적 탐구의 목적이 교양이다, 아니다를 논하는 상류층 젊은이들. 그들은 교양과 직업적 지향점이라는 두 의견으로 나뉘어 토론을 벌인다. 그런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는 이 난상토론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심지어 직업의 필요성조치 인지하지 못하고 사회적 경험이라고는 대학과 저희들끼리의 사교가 전부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으면 그만인, 그래서 고작 라틴어를 배우느먀 마느냐에 따라서 교양과 지성이 결정된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왈가왈부하면서 마틴에게 답변을 재촉하는 그들의 모습이 마뜩치 않은 건 나 뿐일까?


인종주의자라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잭 런던의 차별적 인식이 짧게나마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역시 백인이었다 (p58)' 라는 대목이다. 마틴은 아무리 거칠게 일하고 햇볕에 그을려 피부색이 달라져도 자신은 백인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데, 여기에서의 아이러니 역시 차별과 소외계층에 속하는 마틴이 자신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점, 즉 루스가 속한 계급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는 위안이 아니었나싶다. 


172.

그는 삶을 알았다. 삶의 공정함만이 아니라 가증스러움을 알았고, 진흙으로 뒤덮였음에도 삶이 위대하다는 걸 알았다.











"인생은, 내 생각에, 실수와 수치뿐." 



중반을 넘어서면 마틴의 인생이 정점으로 치닫는 과정과 거기에서 오는 모순, 그리고 성공의 순간에서 삶의 역설을 느끼며 인생의 공허함으로 또다른 형태의 고통을 겪는 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마틴이 아프다는 소식에 하숙집으로 찾아온 루스는 마틴이 토해내는 저간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그의 절망과 기쁨에 공감하지 못하다. 그녀는 그가 소설을 파는 것이나 그의 문학적 성취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교양있는 직업과 결혼이다. 무엇보다 이 방문을 통해 루스는 가난의 실체를 목격했고, 충격을 받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성인이자 사회의 주류라고 불리는 자들의 가식과 민낯에 가까워지면서 갈등하는 마틴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학문의 심연을 탐구하고 궁극의 사고를 해내는 사람은 제도권 밖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마틴이다. 소위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상류층 인사들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지만, 그들의 학문의 깊이는 허세에 찬 공염불에 불과하다. 마틴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모스 씨의 사고의 한계를 답답해 한다. 도대체 교육을 받았음에도 사고의 확장이 안 되고, 사회적 평등성, 경제적 및 계급적 도덕성 등 어느 것 하나 교육받은 것을 실질적으로 실현하지 않는 자들의 가식이란... 



이러한 가식은 마틴이 작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자 더욱 뻔뻔하게 드러난다. 마틴에게 모욕을 당했거나 마틴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사람들, 민폐를 끼치는 벌레처럼 취급했던 사람들, 너나할것 없이 마틴을 그들의 거실에 초대하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심지어 단칼에 결별을 선언했던 루스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결혼을 애걸하기까지 한다. 읽으면서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그들의 허세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마틴이 굶어 죽어가고 있을 때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이제는 너무 초대가 많아서 입맛을 잃을 지경인데도 사방에서 밥을 먹자고 청한다. 역설이고, 세상의 부조리다.






소위 영혼을 갈아넣은 글보다는 마틴 본인조차 비웃었던, 그래서 그러한 소설을 쓴 자신을 미워했던, 기계적으로 찍어내듯 쓴 가벼운 소설들이 잘 팔려나갔다. 이 대목을 읽다보니 조지 오웰의 <엽란을 날려라>가 생각난다. 오웰이 돈을 벌기 위해 쓴 소설로서 더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작품인데, 소설 속 고든과 마틴은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마틴은 모스 가의 모임에서 사회기득권층, 즉 공화당 지지자들 앞에서 자신은 민주주의와 앙숙이듯이 사회주의와도 앙숙이며, 자신은 철저히 보수적이지만 국가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개인주의자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고, 분노와 흥분을 제어하지 못해 욕설을 내뱉는다. 이 일은 마틴이 상류층의 민낯을 확실히 알게 된 계기가 된다. 


이후 브리슨덴한테 이끌려 사회주의자 모임에 나갔고, 그의 부추김에 연설까지 하게 된 마틴은 극렬한 사회주의로 낙인찍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고립되고 루스와 파경에 이르는데, 실상 마틴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층민과 노동계급의 부당한 대우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몸소 겪었기에 현실적인 주장을 했을 뿐이다. 더하여 그 자신이 상류층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에 적극적으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1권을 읽을 때는 이 부분을 마틴이 갖는 모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마틴의 모습은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고, 동시에 '나'와 같은 계층의 사람에게 갖는 동지애와 정의감. 자신은 개인주의자라고 강하게 말하는 마틴의 말이 납득된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모든 것을 포기한 그때, 2년 동안 거절만 당해왔던 마틴의 원고들을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수락한다. 사실 마틴의 글들은 새로 쓰여진 것들이 아니다. 상류층 인사들이 그를 무시하고 조롱했을 때 이미 쓰여졌던 작품들이다. 쏟아지는 청탁에 바삐 처분하는 원고 무더기는 그가 한때 비참하게 거절당해 수북히 쌓여 있던 원고였고, 현재 그의 원고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출판사 역시 예전에 그의 원고를 가차없이 돌려보냈던 곳이었다. 


이제 마틴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건, 그리고 그들이 마틴에게 기대하는 건, 오로지 돈 뿐이다. 그토록 기대하던 작가로서의 성공 뒤에 마틴이 갖는 감정은 슬픔과 씁쓸함이다. 그가 헤어나올 수 없는 우울감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루스에게 품었던 자신의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이 즈음에 마틴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다방면으로 부단히 애쓰는 리지가 재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러한 모습이 마치 루스의 마음에 들고자 노력했던 마틴의 예전 모습과 겹쳐진다. 어쩌면 그는 리지에게서 자신이 보였기에 그녀와 가까워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틴은 명성이 갖는 허망함을 깨닫는다. 돈과 명예를 가졌지만 기쁨도 즐거움도 없다. 사람에 대한 의심과 외로움과 헛헛함만 남았다. 사다리의 맨 위에 오를 수 있는 순간에 그는 스스로 사다리를 부숴버린다. 


이 소설은 한 남자의 사랑을 통해 사회적 계급에 대해 신랄하게 파헤치며 궁극적으로 삶이 갖는 모순, 그리고 사회 부조리 속에서 한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름에서 오는 역설, 결코 에덴이지 못했던 마틴 에덴의 삶.




58.

"선생님은 기업을 위해 일합니다. 노동계급이나 범죄자들을 위한 변론은 하지 않죠. 수입을 가정폭력범이나 소매치기들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에게서 생계비를 얻는데, 어떤 사람을 누가 먹여 살리든 그 누군가가 그 사람의 지배자입니다. 네, 선생님은 심복입니다. 선생님이 봉사하는 자본가 집단의 이익 증진에 관심이 있죠." (중략) "선생님은 아직도 평등을 믿지만 주식회사들을 위해 일하고, 주식회사들은 날마다 평등을 매장하느라 바쁩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내가 평등을 부정한다고 해서, 선생님이 실제 삶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내가 말로 긍정한다고 해서, 저를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합니다. (...) 평등과 대적하면서 평등이라는 바로 그말을 구호로 외쳐 대지만 말입니다. 평등의 이름으로 그들은 평등을 파괴합니다. (...) 나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개인주의자입니다. (후략)" 


63.

여동생과 약혼자, 자기가 속한 계급의 모든 이들, 그리고 루스의 계급에 있는 이들은 작게 한정된 공식에 따라 작게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군집적인 존재들이었다. 끼리끼리 모여서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틀에 박힌 삶을 살면서, 그들이 종속된 그 유치한 공식 때문에 개인이 되지 못하고 삶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다.








#마틴에덴

#잭런던

#녹색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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