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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디에 Nov 30. 2022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임레 케르테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서 어린 시절의 기숙학교 생활과 홀로코스트,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 결혼생활까지 지난 과거를 회상하며 써내려간, 노년에 접어든 화자의 회고록이자 자기청산의 과정이다.






어린시절 집에서 삭발한 폴란드 여인을 본 것을 계기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게 된 화자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그것도 생사를 위태롭게 하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유쾌하지도, 이해되지도 않았다고 술회한다. 더하여 유대인이라는 결속력 때문에 오히려 타인과 자연과 심지어 자기 스스로와도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잃으며 명확하게 짚어 말할 수 없는 도덕적 비참함을 맛본다. 그러나 유대인을 혐오하는 여성 앞에서 그 자신 역시 삭발한 폴란드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저주이며 구원은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생존의 공범자라고 지칭하며 태어남과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의 생존에 치욕을 느낀다. 그러기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생존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화자는 무엇이 자신에게 글쓰기를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면서 딱히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존재하므로 쉼 없이 글을 쓴다. 즉 그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생존이다. 


강제수용소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끔찍한 기억은 일상에서 무시로 몰려온다. 화자에게는 두 가지의 삶이 존재하고 그중 하나가 정신의 삶, 정신적인 현존의 형태라고 말하면서 전쟁이 끝났어도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혹은 참혹한 과거의 기억은, 정신적인 삶의 사망선고와 다름없음을 이야기한다. 


화자는 대중이 흔한 범죄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미치광이 히틀러를 신격화해 영웅으로 만들었고 말한다. 즉 그를 범인凡人이 아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추종자였던, 혹은 방관자였던 스스로에게 명분을 부여한 자기합리화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과학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날조와 교조에 무릎꿇은 다수를 향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어린 시절에 수용소로 수송될 당시 자리를 이탈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더 연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버리면서까지 화자에게 식은 배식을 전해준 '선생님'의 행위에 대해 화자는 어떠한 이름을 붙이려 들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오히려 여타 이물질이 섞이지 않는 가장 순수한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한 것은 아닐까. 또한 화자는 '선생님'의 행위가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남는 방식임을 통해 결국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를 역설한다. 


화자에게서 돈 또는 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일 뿐이다.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떠안아야 하는 불평등, 부자유, 독립성 훼손 등에서 오는 부조리함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돈은 곧 강제수용소에서의 배식과 같다. 자신의 삶의 주인일 수 없는 변하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함이여.






세상을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고, 다른 세상 혹은 죽음 이후의 실존 여부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으며, 정서적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어중간하게 살고 있는 삶을, 화자는 이름붙여 특정할 수 없는 죄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화자가 시도하는 삶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은 냉담해지기다. 아무리 자신의 본질과 존재 이유를 자문하지만 답을 구하지 못하는 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소유할 수 있다면 그의 정체성은 실현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나 깊게 마음이 아팠다. 소외감을 느끼며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자신을 온전히 소유함으로써 정체성을 실현하고 싶다는 화자의 말이 왜 이토록 절박하게 들리는지. 그러면서도 타인이 내미는 이해심은 감당할 수 없어 선뜻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이를 원하는 아내에게 "안 돼!"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한 화자. 그는 아이의 울음 소리에서 "나는 유대인이 되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상상한다. 그 "안 돼"의 의미가 '유대인은 안 돼'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비록 유대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서는 화자에게 아무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기에 그 절망감은 더욱 크다. 그의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에 자신이 겪었던 일을 미래의 어린 누군가에게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화자에게 있어서 유대인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빨간 잠옷을 입은 대머리 여자이고, 체험으로서의 관념은 그의 생존 자체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기숙학교와 아우슈비츠를 같은 선상에 놓으며 공포가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로 굳어지는 것에 대한 폐해에 대해 얘기한다. 세계가 모두 아우슈비츠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폭압이 난무하고 경외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약자는 어쩔 수 없이 폭력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한 세상에 과연 희망은 있을까?







이 소설은 태어날 수 없는 화자의 아이를 향한 애도 혹은 태어날 아이들에게 이러한 세상을 물려주는 것에 대한 사죄가 아닐까. 그리고 화자가 아내에게 했던 고백이, 저자가 쓴 이 글이,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한 애도이자 동시에 치유가 아니었을런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적응과 조화를 이유로 들어 복종을 교육받아왔다. 가끔 주변 지인들로부터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시키는대로 하지 않아서 힘들다는 하소연을 듣곤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스로의 삶이 얼마나 만족스럽길래 아이를 자신의 삶의 궤적대로 키우고 싶어할까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얘기하면서 실상은 허울좋은 단어를 사용해가며 지금도 복종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화자는 진정 자신과 화해했을까. 슬픔과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뒤덮여 한편으로 냉소적이기까지 한 이 글에서 나는 그의 안온함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책을 덮으며 그를 위해 기도한다. 아멘. 




사족

'인간의 가장 큰 범죄는 태어나는 것이다'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의 '인생은 꿈'에서), 이 구절은 너무 비관적이다.




#태어나지않은아이를위한기도

#임레케르테스

#민음사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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