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질병일 수도 있고 신체적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만큼 사람을 집요하게 무너트리는 고통도 드물 것입니다. 일상에서 가난이 주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자식들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해 주지 못할 때가 아닐까요? 배고픈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 가난 때문에 차별을 받아 눈빛이 흐려진 아이를 보는 부모의 그 심정, 또래 아이들에 비해 현저히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 가장 큰 고통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삶, 미래를 상상할 능력이 박탈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가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습니다. 노력하지 않았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가난은 개인의 성품이나 태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출발선에서부터 차이, 교육의 기회, 노동 시장의 구조, 주거와 의료 조건이 한 사람의 삶을 거의 결정합니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라기보다 사회가 배분한 조건의 결과에 가깝습니다.
가난이 더 혹독한 이유는 인간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꾼다는 데에 있습니다.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 사람의 생각은 자연히 ‘오늘’에 갇히고 맙니다. 내일이나 다음 달을 계획할 여유가 없고, 장기적인 판단은 사치가 되고 맙니다. 이때 외부에서는 비합리적이고 유치한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도 당사자에게는 무너짐을 늦추기 위한 최선의 대응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도덕성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을 고민할 시간과 공간을 빼앗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가난이 분노보다 체념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노는 그래도 아직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난이 장기화되면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탓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는 말은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결함으로 바꾸는 사회적 언어가 내면화된 결과입니다. 이때 고통은 소리 없는 침묵이 되고, 가장 잔혹한 형태로 지속됩니다. 특히 가난 중에서도 극빈 상태가 되면 분노할 체력도 없고, 항의할 언어도 잃어버립니다. 누구와 연대할 네트워크도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가난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역사적으로 완전한 빈곤의 제거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가난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완화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교육, 주거, 의료, 최소한의 소득 안정은 시혜가 아니라 공동체가 지켜야 할 마지막 도리이고 장치입니다. 우리 모두가 관심과 연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더욱 절실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