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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드리 Jul 28. 2024

나의 블라인드 데이트 체험기

고등학교 축제에서 생긴 일

이 나이에 내가 블라인드 데이트를 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작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교 축제일이 며칠 남은 시점이었다. S양이 뭔가를 골똘히 하고 있기에 뭐 하냐고 물어보았다. 축제 때 동아리에서 하는 '블라인드 데이트' 준비 중이라고 했다. 

"와, 재밌겠다.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쳐다보지도 않고 씩 웃는 모습이 가당치도 않다는 표정이다. 머쓱해서 읽던 책이나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한참 있다가 S양이 진지하게 물었다.

"샘, 진짜 해 보실래요?"

측은지심이라기보다는 반짝이는 눈망울에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했다. 

다음 날 문자가 왔다. 네이버 폼에 정보를 입력해서 보내라는 것이다. 이름, 학번, 원하는 시간대 같은 것이었는데, 그 문자는 '이 폼을 보내지 않으면 자동 취소됩니다'로 끝났다. 작성해서 보내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아이들 노는 데 괜히 교사가 끼어서 김새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동 취소되게 내버려 두었다. 

축제 전날 다시 문자가 왔다. 1시 23분까지 2학년 5반 교실 앞문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반드시 강당 위층으로 돌아서 오라고 루트까지 알려주었다. 답을 보냈다. 

'S야, 샘도 하는 거야? 폼 제출 안 하면 자동 취소라 해서 안 했는데 ㅎ.'

'꼭 오셔야 해요. ㅎㅎㅎㅎㅎㅎ'

'ㅇㅋ, 나머지 책임은 니가 지는 거야.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축제 당일, 그게 뭐라고 아침부터 가슴 한구석이 설레기 시작했다. 옆에 동료 선생님들이 더 난리가 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축약어를 좀 아셔야 하는데."

"부먹, 찍먹 이런 건 아시죠?

"모쏠이냐고 물어보세요. 기선 제압하는 거죠."

"그러면 기선이 제압되는 건가요?"

"모쏠이지만 자만추라 하세요."

"자만추가 뭐예요?"

"아이고 큰일 났네. 자만추를 모르시다니"

"자장면에 만두 추가 아닌가?"

"아니 아니,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예요."

여기저기서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고 있었고 내가 보기에 살짝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혹시 남자 샘이 나오시는 건 아닐까요?"

"음... 문자 마지막에 ㅋㅋㅋㅋㅋ가 좀 걸리긴 했어."

다들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잠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른 상태에서 비밀 루트를 따라 현장으로 향했다. 

2학년 5반 교실 앞으로 가니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내 눈에 안대를 씌웠다. 교실 안으로 데리고 가서 자리에 앉히더니 안대를 벗으라고 했다. 앞에 가림막이 놓여 있는 책상이 있었고 옆에 진행하는 중개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표정 없는 건조한 얼굴로 데이트를 진행하였다. 둘만 앉아서 무슨 얘길 하나, 코를 쥐고 말을 해야 하나, 톤을 높여 말해야 하나, 밤새 하던 걱정이 한방에 날아갔다.

먼저 MBTI 유형을 물어보았다. 둘 다 내향적이었다. 시작이 좋았다. 그리고 밸런스 게임으로 들어가서 진짜 고전적으로 자장면이 좋으냐 짬뽕이 좋으냐, 부먹이나 찍먹이냐를 물어보았다. 맞춘 듯이 같은 답을 하였다. 중개자가 이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고 흥분하며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하였다. 몇 가지 더 질문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마지막 질문 때문이다.

"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해보겠습니다. 민초, 반민초? 먼저 남자분, 민초세요 반민초세요?'

"반민초요"

당황했다. 민초라니. 이건 뭐지. 내가 알고 있는 민초는 대학 때 데모하면서 들었던 '잡초같이 강한 민중' 밖에는 없는데. 그걸 왜 왜 21세기의 고등학생들이 들먹이는 거지.

"자 그럼 여자분은? 민초, 반민초?"

"... 민초?" 

끝을 올려서 작게 답했다.

"아 여기서 의견이 다르군요. 그럼 남자분은 왜 반민초세요?"

"저한테는 좀 센 느낌이라서."

목소리가 늙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민초가 쌔다고? 일벤가? 태극기 부댄가? 별생각이 막 들고 있는데

"아 네 그럼 여자분은 왜 민초세요?"

"음... 그냥.. 으.."

"아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자 그럼 이제 결정의 시간이 왔습니다. 가림막을 걷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반민초가 어떤 '녀석'인지 보고 싶었다. 그제야 중재하던 여학생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가림막이 올라가니, 눈앞에, 얼굴이 하얀 앳된 남학생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눈꼬리를 심하게 내리면서 말했다.

"미안해. 내가 너무 궁금해서 신청했어."

녀석은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지만 차츰 상황 파악을 하고 괜찮다며 즐거웠다고 했다.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함께 영화도 보았다. 단편영화 제작반에서 만든 '용의자들'이었다. 팝콘도 먹고 셀카도 찍었다. 

"G야, 오늘 실례가 아니었기를 바란다. 졸업할 때까지 샘찬스가 필요하면 언제든 와라. 함께 데이트해 줘서 고마웠어."

나중에 찾아보았다. 민초, 반민초! 민트 초콜릿, 반민트초콜릿이란다. 난 민초가 맞다. 사육사가 꿈이라는 G는 민트초콜릿아이스크림은 안 좋아한단다. 난 좋아한다. 

(** Blind date(블라인드 데이트)란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처음 만나는 소개팅을 말합니다. 즉, 만날 상대방의 정보나 외모 등을 사전에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만나는 데이트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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