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고민을 더하는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

세 번째 떠오름

by 김얼레

I Color code, 518C 그리고 2287C


물러 터져버릴 때까지 익어버린 자두와 그 옆에서 온전히 빛나는 어린잎.

익을 대로 익어버린 자두는 손이 살짝만 닿아도 터져버릴 것 같고,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찝찝한 냄새가 날 것 같다. 그런 자두는 자신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푸른빛을 바라보고, 때때로 시기하고, 또 그 주위를 맴돈다. 그에 반해 어린잎은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 주위에 존재하는 수많은 칙칙함 사이에서 온전히 그만의 빛을 낸다. 소중한 만큼 가냘픈 어린잎은 고고하면서도 위태롭다. 언젠가 칙칙함 속으로 영원히 빠져들까 아슬아슬하다.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소중한 어린잎을 위해 ‘걸림돌’처럼 보이는 자두를 치워버릴 것인가? 자두를 치워버린 뒤에 어린잎은 계속해서 빛날 수 있을까? 자두만 사라진다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인가? 최소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자두는 그만큼 어린잎의 소중함도 잘 알고 있었다.


자두와 어린잎,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우리. 명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명확한 질문을 받아든 우리는 선뜻 어떠한 대답도 내놓기 어렵다. 오늘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선명한 색을 유지하다가 영화가 끝난 뒤 모든 것을 흩트려놓곤 관객을 오래도록 괴롭힌다.



I ‘범재(凡才)’가 천재에게 욕망을 투영할 때



천재와 범재. 사실 영화에서 드물게 쓰이는 소재는 아니다. 대충 떠올려 봐도 유명한 영화들이 많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이야기를 담은 <아마데우스>, 극한으로 치닫는 드러머의 이야기 <위플래쉬>, 천재와 그의 스승의 이야기 <호로비츠를 위하여> 등등. 빛나는 재능을 발현시키는 천재, 그를 시기하는 범재, 그리고 천재를 키워내는 스승, 저마다의 포커스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익히 그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결이 비슷해 보이지만, 오늘의 영화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조금 다른 곳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흥미롭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매우 명료한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 중심적으로 나오는 인물들은 영화가 끝난 뒤에 한 번에 떠올릴 수 있고, 또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복잡한 플롯 속에서 관객들이 그것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힘을 쏟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명료한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 순간 영화가 던지는 선명한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영화를 보고 있을 때보다 영화가 끝난 뒤가 훨씬 괴로운 영화이다.


I 주인공 리사의 갈등, 고통, 그리고 집착



예술이라는 건 가볍고도 무겁다. 하루는 ‘나도 저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코웃음 치면서도, 또 다른 하루는 ‘저건 도저히 내 영역이 아니야.’하고 생각한다. 가까워졌다 싶을 때 저 멀리 도망가버리는 예술, 그리고 아무나 할 수 없을 것 같은 창작은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더욱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평범한’ 주인공 리사(매기 질렌할)가 있다. 그녀의 시는 따분하기 짝이 없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표현, 누구나 생각해낼 것 같은 비유, 그래서 그녀의 시를 읽을 때 누구도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는 그녀의 남편조차도. 그리고 관객으로서 영화를 봤던 나도 극 중에 나왔던 그녀가 쓴 시의 단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불행은 그녀가 가진 창작, 시,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에 있다. 좋은 시를 쓰고 다른 이들을 감동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신은 그녀의 재능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괴로움에 빠진다.


이러한 리사의 문제는 두 가지 비뚤어진 양상으로 뻗어간다.


01.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 그리고 실망

리사가 스스로 충족하지 못하는 예술적 욕망은 자연히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 실망, 그리고 집착으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리사의 다음 세대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녀가 운영하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으며 시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지미, 그리고 예술 따위에는 관심 없고 파티, 연애, SNS ‘따위’에만 관심이 있는 그녀의 아이들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리사는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몹시 실망하고 급기야는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들 또한 그러한 리사의 태도에 반감을 갖고 서로 점점 멀어진다. 영화는 분명 리사의 심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런데도 아이들을 실망하고 포기하는 리사의 감정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다음으로 리사는 지미에게 집착한다. 처음 지미의 빛나는 재능을 알게 된 뒤 ‘유치원 교사’로서 지켜야할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또 넘는다. 지미의 시를 훔쳐 자신의 시처럼 읊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지미의 재능을 알게 하기 위해 부모의 동의 없이 몰래 시를 발표하는 자리에 데려가기도 한다. 급기야는 지미를 납치하기까지 한다. 모든 건 지미를 위해서라고, 이런 재능을 썩혀서는 안 된다고, 세상을 그런 지미를 지우려 한다며 계속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설명을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이 점점 불편해지는 건 그 뿌리엔 그녀의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어떠한 형태이든 리사의 행위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그것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온전히 채우지 못한 욕망을 다른 이에게 투영했을 때, 설령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든 어떠한 형태로든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리사의 도를 넘은 행위들은 결국 어떤 결과로든 돌아오게 될 것 같다.


사실 개인의 결핍이 건강하게 발산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에서 ‘결핍을 딛고 올라선’ 사례들이 길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선’으로 향하는 것은 인간이 평생 가질 수밖에 없는 과제이자 도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경계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02. 잘못된 욕망으로 인한 섹스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서 리사는 총 두 번의 섹스를 한다. 첫 번째는 남편 그랜트와의 관계, 그리고 두 번째는 자신의 시 선생 사이먼과의 관계이다. 이는 예술에 대한 욕망에 지배당한 리사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리사의 남편 그랜트

먼저 그랜트와의 섹스에서는 리사의 어떠한 욕망보다도 ‘시’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창 즐거운 순간을 보내고 있다가 지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자 모든 걸 중단하고 전화를 받고 시를 받아 적는다. 그녀의 행동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미안함도 없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뒤로 얼떨떨하게 옷을 입고 걸어가는 그랜트의 모습은 우스우면서도 놀라운 장면이다.


시 선생 사이먼

그리고 영화의 중반, 변해가는 리사의 시(실은 지미의 시였지만)에 반한 시 선생 사이먼은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키스한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만두려하지만, 끝내 둘은 관계를 갖는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상황에서 리사가 한 선택은 아마 ‘도를 지나친 예술에 대한 욕망’에서 기인한 것과 동시에 ‘그렇게나마 자신의 시에 대한 인정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거짓으로라도 얻어낸 인정을 그녀는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기분은 점점 더 불쾌해지고 불안해진다. 외줄타기를 하는 리사가 점점 더 과감하고 선을 넘는 행위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 끝은 지미를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I 결국은 지미의 재능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



영화는 리사의 감정과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결국 영화가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미의 재능을 둘러싼 다양한 시각들에 있다.


먼저 리사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지미의 재능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급기야는 그 집착이 ‘납치’라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반면 지미의 아버지는 지미의 재능에는 관심이 없었고, 시나 예술에 관련된 재능보다는 ‘돈’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좀 더 중시했다.


이 둘 사이에서 지미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느 정도 답을 내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그 답이 ‘그래도 리사는 아니지.’였을 수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모든 건 흐트러진다. 영화의 중반쯤 리사는 ‘세상이 지미를 지우려 한다.’는 말을 스치듯 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경찰이 리사를 연행하고 지미를 경찰차에 태웠을 때 지미는 외친다.


“시가 떠올라요!”


그러나 경찰차 문은 이미 닫혔고, 지미의 시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그 누구도 ‘모른다’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리사의 말처럼 정말 지미가 세상으로부터 지워지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그 누구도 쉽게 영화의 질문에 답하기 어렵게 한다.



I 반짝이는 세상을 위해서



나 또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지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좌절스러웠던 건, 뭐가 됐든 한 사람의 재능은 누군가가 알아봐주지 않는다면 빛을 받기 어려운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치원에서의 리사가 자신의 관심 분야였던 ‘시’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지미 외에 다른 아이들에게는 심드렁하던 그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만약 리사가 시에 관심이 없었다면, 영화 속에서 누구도 지미의 시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고, 동시에 지미는 결코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빛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그 빛을 제대로 발해 감히 누구도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두터운 먼지에 싸여 존재를 드러내지조차 못한다. 그것이 개개인이 가진 재능의 ‘질’에 관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분명 각자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각자만의 재능이 있을테니까.


한편으로는 영화가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리사나 지미의 아버지 둘 중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것보다는 서로의 빛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자는, 그리고 내가 가진 빛을 소중히 여기자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지미의 재능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는 관심을 가져서 시작된 것이고, 또 지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으로, 그리고 그들이 지닌 빛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의 빛을 존중하지는 않는 것 같다. 편향된 빛만을 추구하면서 우리가 다양한 빛들을 점차 잃어갈지, 각자가 가진 빛을 최대한 발하게 할 수 있을지는 영화가 끝난 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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