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타오에서.
저와 취향이 꼭 닮은 분이 타오를 소개해주셨습니다. ‘우리 감성과 잘 맞는’ 곳이 있으니 꼭 가보라고요. 사람들이 북적이는 무지갯길로부터 아주 조금 돌아들어왔을 뿐인데 고요하고 낮은 집, 작은 텃밭, 이따금씩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고 듣고 있자니 단번에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이집이 꼭 제 마음에 들 거라는 걸요. 너무 감성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죠. 그래도 어때요. 여기는 제주고, 저는 이성의 세계로부터 잠깐 도망나온 여행자인 걸요.
사실 다음주에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다급히 제주로 날아왔습니다. 분명 원했던 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껏 누렸던 불안한 자유가 나쁘지만은 않았던 건지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잘해낼 수 있을까, 부터 시작해서 원하는 일을 하겠답시고 남들보다 돌아돌아 가고 있는데 또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면 어쩌지, 이번 결정에 있어 나는 얼마나 솔직했나, 뭐 그런 생각들로요.
엉킨 실타래같은 마음을 한가득 안고 온 제주에서 내내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일몰을 보겠다며 고내리에서 곽지까지 달릴 땐 지기 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출렁이는 갈대와 애월 바다를 보며 정말이지 새로운 시작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오늘 타오에서 알작지까지 달리는 동안은 빠르게 지는 해 만큼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 바다의 풍경에 흠뻑 빠져 쓸데없는 생각은 끼어들 틈이 없었어요.
딱 거기까지 달렸어야 했는데, 어두워진 도두해안이 아름다워 FKJ의 노래를 들으며 좀 더 달린 탓에 괜히 슬퍼져버렸습니다. 밤바다가 너무 아름다웠어도 오래 보지는 말 걸, 혼자 너무 오래 걷지 말 걸, 여행의 말미엔 FKJ의 노래를 듣지 말 걸. 벌써 이 모든 순간이 그리워진 탓에 손끝만큼 시린 마음으로 타오에 돌아왔습니다. 괜한 슬픈 여운 때문에 하루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쉬웠고, 이 많은 책을 하나하나 볼 새도 없이 떠나야한다는 마음에 서둘러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거쳐간 분들의 문장들, 신의 물방울 전권이 함께 있는 거실, 좋아하는 클래식이 새어들어오는 방을 찬찬히 둘러보고나니 차츰 울렁이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밤바람에 땀이 식어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물로 달래고 나니 비로소 슬픔보다는 지금의 안락하고 소중한 시간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미리 피워두어 은은한 향내, 서울의 작은 자취방에선 맡기 어려운 책이 가득한 공간의 내음, 본가에서도 맡아 익숙한 커피의 잔향. 한 단어로는 정의하기 어렵게 다채로운 타오의 향을 느끼며 어느새 원고지 두 장을 채워가고 있네요.
2박 3일. 짧은 시간 동안 혼자 여행하며 제주가 선물한 순간에 온전히 행복하기도, 또 언제 이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 서운해하기도 했지만, 타오의 편안함 속에서 어지러웠던 마음의 덮개를 닫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정말이지 예상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 과정과 끝이 충만한 성공인지 아픈 좌절인지에 관계 없이 온전히 행복할 수 있는 제주의 풍경과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나아가보려 합니다. 여기까지 읽은 분이 계실진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를 안고 오셨더라도 제주에서의 기억이 행복하셨길, 그리고 언젠가 또 그 행복을 다시 느끼러 올 수 있다는 걸 기억하시길 바라요.
2022. 11. 16. 수요일
러닝과, 음악과, 타오로 이번 여행을 기억할 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