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병원에서 바라본 환자들의 삶 그리고 우리의 인생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만큼 슬픈 일이 또 있을까.
알츠하이머는 내 가슴을 항상 먹먹하게 만드는 단어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이 꽤 있었다.
그중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사람은 내 외할머니다.
혹시 알츠하이머 환자의 눈빛을 제대로 본 적이 있는지.
우리 외할머니를 가까이서 보고 느낀 점이라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느낀 점을 그대로 옮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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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을 이제 막 잃어가는 사람은 이 상황을 애석해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눈빛이 가득하다.
(제삼자 입장에서 볼 때 당황한 눈빛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2. 중기에는 눈물이 많아져 눈빛에 슬픔이 가득 차는 것 같다. 이때가 보호자의 눈물도 덩달아 많아지는 시기 같다.
3. 기억을 아예 잃은 사람은 순수한 어린 내 같다. 자식과 손주를 알아보지 못해 "너는 누구냐"며 여긴 어딘가를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사람 같은 눈빛이랄까.
2017년 겨울,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보러 머나먼 미국까지 달려간 적이 있다.
이 때는 한국에서 무려 7개월간 인턴 하면서 처음으로 긴 휴가를 받고 캐나다에 있는 친구들을 보러 가기 위해 비행기를 끊었던 때다. 그러다 캐나다로 넘어가기 한 이틀 전이었나.
엄마가 "OO아, 미안한데... 미국에 계신 외할머니 좀 보러 다녀와줄 수 있어?
엄마가 꿈자리가 썩 좋지 않네.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라고 했다.
미안할게 뭐가 있어, 내 외할머니이고 내 엄마의 엄마인데.
당연히 가야지.
엄마는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가더니
수면양말과 면양말, 수면잠옷, 속옷 등 할머니가 좋아할 만한 촉감의 따듯한 내의를 샀다.
굳이 이 돈 주고 사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었지만,
우리 엄마는 병든 자신의 엄마가 적어도 춥지는 않게 계시기를 간절히 원했다.
짐을 싸는데 할머니 짐 부피가 많아서 애를 먹었지만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는 우리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짐을 쌌던 기억이 난다.
난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친오빠와 함께 미국으로 곧장 향했다.
할머니가 좋아했던 Werther's Original 캔디와 엄마의 사진, 꽃을 사들고 갔다.
요양원에 가보니 우리 외할머니는 기억을 아예 내려놓고 계셨다.
몸도 깡깡 말라서 뼈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수면잠옷을 입혀드렸더니 그제야 차가웠던 몸이 따듯해지더라.
할머니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너는 누구냐~?"
"에이 할머니, 나 OO이. 할머니 막내딸의 딸! 나 할머니 손주예요"
"어, 네가 내 손주여~? 한국어 할 수 있는 사람이라 반갑구먼 반가워."
우리 엄마가 이 모습을 안 보기를 참 다행이다 싶었다.
나도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은데 우리 엄마는 얼마나 더할까.
우리 할머니는 이듬해 4월 25일 돌아가셨다.
내가 다녀간 지 불과 120일 만이었다.
엄마는 오빠와 내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나 또한 그랬다.
우리 외할머니처럼 소녀 같고 예쁜 사람이 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일이 우리 엄마에게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유전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벌써 엄마를 위해 기도한 지도, 엄마에게 외국어 수업이라도 들으라며
등을 떠민 지도 얼추 8년이 다 되어간다.
다행히 엄마는 일본어 마스터가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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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병동에 자주 가는 내 남편에게 요새 묻기도 한다.
알츠하이머 환자도 보느냐고,
어떤 치료를 병행하는 거냐고.
남편은 내가 그럴 때마다
자신이 보는 환자와 치료제 이야기를 종종 해주면서도
자리를 내 옆으로 옮기고는 걱정하지 말라며 내 등을 쓸어내린다.
내가 우리 엄마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에.
다음 편에는 남편 병원에 있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에 대해 조금 더 실어볼까 한다.
내가 자라온 시간만큼
부모님과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해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