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 책 선정에 관해 #1
남편과 나는 상반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독서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아왔다. 필요에 의한 실용서적은 가끔 탐독하지만 무협지조차 읽다 말 정도로 픽션은 거의 거들떠보지 않는 편이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수록된 한국 근대 단편과 고전의 저자나 제목을 지금도 달달 외우고 있다는 게 희한할 따름이다. 누구나 알법한 소위 명작동화도 잘 모르는 편인데 본인은 책을 처음 접했던 순간의 트라우마가 그 이유라고 항변한다. 부모님이 삽화가 전혀 없이 글자만 빼곡하고 두꺼운 동화전집을 책장에 잔뜩 꽂아두고 읽기를 강요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책장 근처도 가기 싫을 정도로 진저리 치게 되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쯤인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노란색 표지의 두꺼운 동화책 한 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이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해주셨다는 걸 어린 나도 눈치챌 수 있었는데 책을 높이 쌓아두고 환하게 웃고 계셨던 두 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책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난 그저 얼떨떨하게 서있기만 했다. 노란색 표지도 마음에 들었고 한참을 읽어도 될 만큼 책이 두껍다는 것도 좋았다. 빳빳한 표지를 넘기자 페이지 가득 작은 글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는데, 그것들이 미지의 세계로 나를 데려가 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과연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을 들고 구석진 곳에 앉으면 금세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 세상에는 신기하고 멋진 일들이 가득했다. 한동안 독서는 그렇게 현실도피의 달콤함을 내게 제공해 주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떤 독서 경험을 갖게 해야 좋을 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틈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어주고 도서관과 서점도 자주 데려가고 검증된 좋은 책을 추천받으려고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하고, 가급적 다양한 책을 가까이 놓아주려고도 했다. 마침 논술이 대학입시를 좌지우지했던 때라서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에 맞춰진 전략적인 독서의 광풍이 불던 때였다. 나도 그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책이 만났던 행복한 순간에 대한 기억이 다른 길로 샐 때마다 나를 같은 자리로 되돌려놓곤 했다.
책과의 첫 만남은 무조건 신나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직접 그 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정신없이 빠져서 누가 뭐래도 들리지 않는 순간을 맛봐야 한다는 그 지점으로 말이다. 그 한 번의 경험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서 책 읽기의 즐거움은 쌓여가고, 책을 통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내 앎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사유의 세계도 깊어지게 된다는 것, 책 읽기가 더 이상 달콤한 현실도피가 되지 않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결국엔 알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