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제목 '북극 이야기'에'얼음 빼고'가 붙었다. 북극을 말하는데 얼음을 뺀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게 만든다. 아아를 주문하면서 얼음 빼달라고 하는 것 처럼.
북극 이야기, 얼음 빼고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연구부원장인 저자는 2011년부터 북극 관련 연구에 참여하기 위해 북극을 33번 방문했다. 이 책은 저자가 본 북극 이야기이다.
시작 부분에 북극권 지도가 나온다. 지구본이 아니라면 펼쳐진 세계지도에서 볼 수 없는 북극권 모습이다. 특히 이 책에서 다루는 지명들을 상세히 표시해 두어 책을 읽는 내내 참고하기에 좋았다.
북극권 지도
북극을 뜻하는 영어 '아크틱(Arctic)'의 그리스어 '아르크티코스(Arktikos)'는 '큰 곰의 땅'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는 북쪽 너머를 인간이 아닌 곰의 세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북쪽 하늘 별에 큰 곰자리와 작은 곰자리를 만들었고, 작은 곰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 북극성이다.
러시아의 상징은 곰이고, 북극바다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는 북극곰이다. 고대 그리스뿐 아니라 북방의 많은 민족들이 곰을 숭배하는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웅녀도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북극해에 접해 있는 러시아, 미국(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노르웨이 다섯 나라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이 다섯 연안국은 2008년 그린란드 일룰리셋에서 만나, 북국 국제 연합의 '해양법에 관한 국제 연합 협약'외에 새로운 규범이 필요 없음을 선언했다. 연안국이 북극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말이다. 이 결정은 큰 논란을 야기했는데,북극해에는 모든 국가가 권리를 가지는 공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매머드 왕국 '사하 공화국'
러시아 사하 공화국의 별칭은 '매머드 왕국'이다. 빙하기 이전 따뜻했던 시절 이 지역에는 초목이 우거졌고, 대형 초식동물들이 살기 좋았다. 당시 매머드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상아를 뜻하는 영어 '아이보리'는 이집트어 '아부 abu'로 '코끼리'를 가리킨다. 코끼리 상아의 높은 상품성으로 상아는 오히려 코끼리 생존에 가장 큰 위협의 이유가 된다. 멸종 위기인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코끼리 상아를 대체할 매머드 상아가 관심을 끌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생존하다가 4000년 전 멸종한 매머드가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 묻혀 있다. 1000마리 이상으로 추정되고, 그중 80퍼센트가 사하공화국에 있다.
멸종된 매머드의 잔해를 사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긍정적 이유로는 코끼리를 보호할 수 있으며, 자원개발 외 마땅한 산업이 없는 북극 지역민의 경제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매머드 상아를 사용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동토층을 파헤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병원균이나 지반 함몰 같은 재해 위험이 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인 바이칼 호
러시아 바이칼 호는 우리 민족의 원류가 시작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샤머니즘의 시작이기도 한 이곳,부랴트 공화국 사람들은 생김새, 언어 체계, 전통과 관습, 호숫가에 핀 진달래꽃까지 한민족과 많이 닮아 있다.
또한 사하공화국 사람들 외모도 우리와 많이 닮았다. 그들의 기원도 바이칼 호에서 왔으며 1300여 년 전 발해를 함께 건국했다고 한다.
순록
시베리아 에벤키 족은 야생 순록을 사냥해서 고기를 먹고, 기르는 순록에게서는 젖을 얻는다. 기르는 순록을 먹기 위해 죽이는 일은 거의 없다.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경우에는 순록의 영혼이 자신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고 사과의 말과 함께 총 대신 칼을 써서 고통을 최소화한다.
또한 순록을 먹을 때 혀끝은 먹지 않는다. 순록의 혀끝을 먹으면 거짓말을 하게 된다고 믿는다. 혹은 영령들의 음식이므로 불 속에 던져야 한다고도 한다.
원자력 쇄빙선
전쟁도 불사하는 부동항에 대한 러시아의 오랜 열망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뜻밖의 지구 온난화로 러시아는 해양강국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원자력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다. 쇄빙선은 배가 무거울수록 얼음을 부수는 힘이 커지지만, 대신 연료가 많이 들어간다. 북극해 연안에서 연료를 자주 공급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장기간 연료 공급이 필요 없는 원자력쇄빙선이 필요한 것이다.
캐나다
케임브리지베이 같은 북극권 오지 마을은 대부분 상하수도 설비가 없다. 영구 동토층이기 때문에 땅 속 깊이 파이프를 설치하는 것이 힘들고, 설치하더라도 여름이 지나면 곧 얼어서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활용수 공급이나 분뇨, 폐수 처리가 매우 제한적이다.
저자가 만난 원주민 여학생들은 북극에 적응한 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졌지만, 이와는 별도로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들은 현실에 대한 욕망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본인의 감정을 토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린란드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의 또 다른 이름은 덴마크어로 '희망'을 뜻하는 고트홈 Godthab이다.
그린란드는 10세기말 바이킹이 진출해서 세웠으며 15세기 소빙하기 때 바이킹은 떠났다. 1814년에는 덴마크 식민지가 되었다. 1953년 식민지에서 벗어나 덴마크령이 되었고, 1979년에 자치권을 확대했다. 2009년 국방, 외교권을제외한 자치권을 확보했으며 독립의 길을 가려고 하고 있다.
그린란드에는 한국인이 딱 한 명 살고 있다. 2015년부터 누크에 살고 있으며, 2018년에 그린란드 사람과 결혼했고, 그린란드 관광청에서 근무하고 있다. 2019년에는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출판한 김인숙 씨이다. 나도 이 책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린란드에 살고 있습니다
누크 인근에 꼬옥녹이라는 곳이다. 저자는 이곳의 눈 덮인 봉우리 셋, 계곡과 폭포, 전나무숲이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한다. 이발소 그림이라고 하면 밥 아저씨 그림이 생각난다. 밥 아저씨는 주로 알래스카를 그렸으니, 같은 북극권 풍경이라 비슷한 가 보다.
꼬옥녹
임창섭의 '이 그림, 파는 건가요?'라는 책에서 저자가 생각하는 이발소 그림의 시작에 대한 글이 있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일본 서양화 모습은 밀레를 중심으로 한 바르비종 화파와, 다소 진보적이면서도 실제로는 아카데믹한 그림이었던 외광파의 그림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밀레의 '이삭을 줍는 여인'이나 '만종'이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되었고, 가장 흔한 그림이 된 것이다. 이런 성향의 그림이 그대로 한국으로 건너와 서양화를 처음 대하는 많은 이들에게 호기심과 새로운 문화충격을 주는 신문물이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임창섭 '이 그림, 파는 건가요?' p254)
이누이트 아이들
1951년 그린란드 이누이트 아이들을 덴마크 사람으로 개조하는 실험이 있었다. 이누이트 아이들을 친부모와 헤어져 덴마크 가정에 입양하게 했다. 교육적 효과를 위해 가족과 연락도 단절시켰다. 이 실험은 철저히 실패했다. 아이들이 이누이트어, 덴마크 어 둘 다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어느 사회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친부모에게 돌아가지도 못해서 결국, 그린란드 고아원에 수용되었다.
만년설 빙하폭포
눈이 물로 변하는 풍경이다. 누크 주변 승미치악산에는 만년설이 녹은 얼음물이 모여 100미터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큰 물보라가 장관을 이루어 관광산업이 되었다.
눈이 물로 변하는 현장
그린란드 사람들은 지구온난화가 위기이면서 곧 기회라고 생각한다. 국토 대부분이 북극권에 있는 그린란드의 얼음이 녹아 땅이 되면서 천연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정보통신 산업 핵심원료인 희토류가 1000만 톤 매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 세계 수요량의 20~25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한다.
15세기 소빙하기 전, 950~1250년 중세온난기 시기에 그린란드로 이주한 유럽 사람들은 얼음이 없는 바다에서 바다표범을 사냥하고 소나 양을 방목하고 작물을 재배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지구 온도는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린란드'라며 살기 좋은 곳이라고 홍보한 바이킹의 부동산 사기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던 건인가.
미국 알래스카
알래스카 원주민은 북아메리카 최초의 인류이다. 그중 대표적인 해양종족인 알류트 족의 말로 '알래스카'는 '섬이 아닌 큰 땅'이라는 뜻이다.
알래스카 우트키아비크 사람들은 오로라를 북극곰과 고래, 물개 등 생존을 위해 잡아먹은 동물들의 영혼이 떠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래스카는 1867년 미국이 러시아에서 720만 달러에 매입했다. 한화로 계산하면 1 제곱킬로미터당 평균 5,000원, 현재가 7만 원 정도이다. 국무부장관 슈워드는 쓸모없는 얼음땅을 샀다는 큰 비판을 받았다. 원래 그는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까지 매입하려고 했으나 여론이 좋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
만약, 러시아가 알래스카를 팔지 않았다면, 혹은 미국이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까지 매입했다면, 러시아나 미국은 지금보다도 더 큰 세계 최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노르웨이
남극을 정복한 북극의 개들
남극점을 최초로 정복한 노르웨이의 아문센, 그리고 두번째로 정복한 영국인 로버트 스콧이 있다. 로버트 스콧 팀은 아문센보다 먼저 출발했지만 남극점 도착이 늦었고, 돌아오는 길에 전원이 사망했다. 이런 결과를 야기한 원인에 대한 분석으로 개썰매의 유무를 들 수 있다. 아문센은 개썰매로만 이동했고, 로버트 스콧 팀은 말과 스노모빌을 준비했다. 말들은 남극에 도착하자마다 대부분 얼어 죽었으며, 기동력이 매우 떨어졌다. 심지어 말의 식량 때문에 짐이 많아 이동은 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준비한 스노모빌은 엔지니어가 합류하지 못해서 무용지물이었다. 반면, 아문센 탐험대는 현지에서 포획한 펭귄과 물개 등으로 개를 먹일 수 있었기에 짐이 적었고, 필요시에는 개 스스로가 식량이 되었다.
인류 멸망 준비를 하는 곳
스발바르제도에는 인류 멸망 준비를 하는 곳이라고 말하는 보관소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하는 종자보관소이다. 종자보관소는 전 세계에 1700여 개가 있다고 하지만, 스발바르제도에 있는 종자보관소는 지구 최북단 마을에 있어서 그 상징성이 있다. 2020년 기준 전 세계에서 모은 105만 종의 종자를 저장하고 있다. 또 다른 곳은 인류의 문화와 기록을 디지털화해서 보관하는 북극세계기록보관소이다. 스발바르제도가 보관소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영구동토층의 지하공간의 저온 보관과 핵무기나 해킹에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스발바르 종자보관소
북극해의 비연안국
그린란드의 일룰리셋은 '빙하'라는 뜻이다.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유빙도 일룰리셋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한다.
2008년 북극해 다섯 연안국이 일룰리셋에서 만난 지 10년 후, 연안국과 다섯 개 비연안국이 일룰리셋에 다시 모였다. 과학적 근거가 마련될 때까지 북극해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공해에서의 수산업 활동을 16년 간 유보하는 예방적 조치에 합의했다. 중요한 점은 최초로 북극 관련 협정에 비북극권 국가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비연안국 다섯은 유럽연합, 아이슬란드, 중국, 일본, 한국이다. 유럽연합에는 핀란드, 스웨덴 등 북극권 나라가 포함되어 있고, 아이슬란드도 북극권 국가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비북극권 국가는 한중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포함되었다는 것이 꽤 놀라웠다. 북극권에 관여하는 국가 중 가장 위도가 낮은 위치에 있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이 합의로 우리나라는 북극해에 관한 과학적 정보를 확보, 북극해의 지속 가능한 이용을 논의하는 데 깊숙이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게 북극이 중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자원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으며 선박제조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멀게만 생각했던 북극이 꽤 가깝게 느껴졌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북극은 또 다른 기회의 땅이 될지, 혹은 분쟁의 중심이 될지,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