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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2. 2021

언제부터 날씨를 안썼더라

왜 어른들의 다이어리에는 날씨 칸이 없을까

  막 유치원에 들어갔을 무렵, 첫 숙제는 그림일기였다. 대략 B4 정도 되는 크기의 그림일기장이었다. 한쪽에는 그림을, 한쪽에는 한 칸에 한 글자를 반듯하게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오늘의 날씨가 있었다.

일기장에 따라 조금씩 아이콘이 달랐지만, 보통은 해, 구름, 비, 번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중에 오늘의 날씨를 동그라미 치고 자세한 날씨를 적을 수 있는 칸이 따로 있었다. 아이들의 세상에서 날씨는 중요한 이슈다. 해가 뜨는 날은 놀이터에 나가 놀 수 있고, 비가 오는 날은 장화를 신고 철벅거릴 수 있다. 흐린 날에는 비를 기다릴 수 있고, 번개 치는 날에는 천둥소리를 기다릴 수 있다. 일상의 단어에도 날씨 의성어가 많다. 소나기가 주룩주룩, 구름이 뭉게뭉게, 해가 쨍쨍. 낮과 밤을 알려주는 항성과 행성에도 해님 달님 같은 애칭을 붙여준다.


  아이들이 날씨에 순수한 마음을 빗대어 표현했지만, 일기장을 보니 그중에서도 나는 날씨에 예민했던 아이였단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년이 조금씩 올라갈수록, 일기장의 줄 간격은 좁아졌다. 그림 칸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날씨 칸도 사라졌을 무렵. 나는 일기장에 날씨는 빠지면 안 되는 수순으로 여겼다. 따로 날씨 칸을 만들어 날씨 일기를 적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린 눈으로 바라본 그날의 날씨. 한편으론 날씨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현재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서도 날씨에 따라 미세하게 기분이 바뀌지만, 자라날수록 날씨에 지지 않으려 스스로가 둔감해지길 택한 건 아닐까. 그래서 애써 날씨가 좋은 날은 작은 순간을 잊지 않으려 현재를 되새긴다. 안 좋은 날은 날씨에 집중하지 않으려 한다. 흐린 날에 마음의 조도가 낮아져도 매일 이런 날인 건 아니니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찾아보려 한다. 그런 날에도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걸 반증하려 노력한다.


  왜 어른들의 다이어리에는 날씨 칸이 없을까. 날씨 따위 하루에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하루를 알차게 보냈냐라고.라는 암묵적인 자본주의적 시그널을 보내는 걸까. 그냥 날씨 칸이 있다면 심심한 어른들이 조금은 하루의 공기를 되돌아보지 않을까라는 유치한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고 날씨에 대한 집착적 기록은 하지 않으려 한다. 어린 시절의 마음을 탐내도 이미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변화하는 날씨의 흐름이 이제는 시간의 흐름으로 직결되어 다가온다. 올해도 흘러가고 있구나. 벌써 여름이 온다고? 이런 생각들. 갑작스럽지만 그래서 어머니들이 꽃을 좋아하나 보다. 다시 보려면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한다는 소중함을 알기에. 요즘은 나도 핸드폰 갤러리에 꽃 사진이 많아졌다.


  1년에 한 번 정도, 대부분 그 해의 끝자락 그즈음엔 어렸을 적 일기를 꺼내보곤 했다. 약간의 강제성이 동반되어 꾸준히 기록된 그 시절 일기들을 보며 그땐 죽도록 싫었던 일기 쓰기 숙제에 고맙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퍽 싫어하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생각들만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일기장엔 가끔씩 빨리 철들어버린 문장들이 등장했다.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삼켰던 말들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세세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지금보다 더 내성적이면서 소심하게 충동적이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지금 보면 별일 아닌 문제들이겠지만, 일기장에 적힌 사건들은 그 당시의 작은 몸집으로 세상을 차지하는 고민이었을 것이다.

연필에 힘이 한껏 들어간 엄지와 검지를 대고 써 내려갔을 15년 전과 지금의 일기장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약간의 의무감과 압박감에 일기장을 펴고, 막상 쓰기 시작하면 속이 후련할 때까지 펜을 놓지 않는다. 그저 글씨를 써 내려가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을 뿐이다. 지금 나의 글자들도 15년 뒤의 본인이 추억에 빠져 펼쳐본다면 순간의 귀여운 고민들이라 여기겠지. 그러니 조금은 편안한 마음을 먹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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