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진 작품 비평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지만, 때로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문이 앞장서서 그것을 해야 할 이유를 찾아주기도 한다. 그 의문은 그 행위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음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이유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스스로에게 묻는 자기 안의 어떤 자문관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러나 여기 필요한 것은 증거가 아닌 확신이다. 증거는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확신은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지난한 삶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문장은 ‘이런 어둠 속에서’, ‘이렇게 약한데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를 주머니 속에 몰래 넣어놓고 틈틈이 매만진다. 윤의진은 그 의문이 떠오를 때면 곁에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의 곁에서 몸을 늘어뜨리고 자고 있는 고양이들에게는 자신을 닮은 데가 있었다. 너무 약한 몸, 놀라기 쉬운 마음, 대단한 용도가 없는 것. 하지만 그러한 모습으로도 충분한 존재들. 작가는 그의 작업에 고양이와 버드나무, 초승달처럼 그를 닮은 것들을 초대한다. 그들을 그려내는 것은 약하거나, 어둠 속에서 원의 반의 반쪽짜리로 빛나는 ‘나’를 닮은 무언가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청량한 나무와는 다른, 오직 두 팔을 늘어뜨린 버드나무만이 가진 아름다움을 그려낸다.
자신의 어둠을 들여다보고 그 어둠을 하나씩 꺼내어 나누는 과정을 지나온 작가는, 2025년에 접어들면서 ‘어둠을 있게 하는 빛’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어둠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반드시 그 주변에 빛이 나란히 있다는 뜻이다. 어둠의 형체에 몰입했던 그는 이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삶을 선명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내가 길러온 숲은 I〉과 〈내가 길러온 숲은 II〉, 〈불안이 사라진 자리에는〉을 비롯한 그의 작업에는 그라데이션을 통해 연결된 빛과 어둠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그는 삶의 풍경을 선명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삶의 선명함을 그림을 그림으로써 체화한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한지는 동양화 물감을 마치 염색하듯 액체 상태 그대로 흡수한다. 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얇은 한 장의 종이가 어느 만큼의 물감을 머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작가는 덧칠을 거듭하면서, 종이가 흡수한 농도의 기억을 자신의 몸에 남긴다. 작업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뚜렷해지는 세필로 그린 선 역시, 화판을 채우는 밀도의 기억을 작가의 몸에 남긴다. 〈포기할 수 없는 나 II〉와 〈희망을 찾는 방법〉 작업을 통해 그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선명하게 포착할 뿐만 아니라, ‘나’의 살아있음을 선명하게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고, 매일 되뇌고 어루만져도 화해하지 못한 마음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며, 살아갈 이유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나’를 돌보면서, ‘나’를 세상에 드러낸다. 윤의진에게 작업을 한다는 것은 나 스스로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