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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선 Jul 08. 2020

미래에서 온 수천 마리의 징후

조주현 개인전: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위켄드)


조건은, 흑공에서 살아 돌아오십시오.


미래의 어느 시점인가? 흑공의 막다른 길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여기는 어딜까. 이때, 손잡이가 달린 문이 발견되었다. 그 문의 손잡이는 예전에 살던 고시원의 손잡이와 똑같이 생겼다. 문을 열면 가난에 쪼들리며 살던 시절의 고시원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혹은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렀다면 여기서 살아남은 유일한 도전자로서 포상금을 거머쥐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아니면 현실에서 미끄러진 이 흑공의 끄트머리가 가장 안전한 곳일까? 결국 이것은 삶으로 돌아가느냐, 삶의 틈에 끼어 의식적 죽음을 맞이하느냐에 대한 선택이다. 문을 열지 말지 망설인다.


문을 열기 위해 입구로 간다.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곳에 다가갈수록 건너편의 건물과 자동차, 그리고 다가오는 내가 보인다. 전시장은 레인보우 코팅된 유리가 빛을 반사하는 덕분에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없다. 블랙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듯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공간에는 영상 작품 <지지대>가 벽면의 아래쪽에 비스듬하게 놓여 있다. 공간을 분리하는 벽의 안쪽 모서리에는 텍스트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와 편안한 의자가 있다. 영상 작품 <흑공>은 전시 공간의 중심부에서 상영되고 있고, 더 깊은 곳에는 웹사이트 ‘Blank Black’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물 위에 떠다니는 장갑을 포착한 영상이 재생되는 RC카는 이 모든 공간을 가로지르며 동선을 간섭한다. 전체적으로 공간은 어둡지만 무지갯빛을 내는 조명이 어딘가 숨어있고, 알 듯 말 듯한 향기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시의 서문은 지금으로부터 20년 후에 바라본 지구 생태와 인류를 묘사하며, 내가 있는 현재를 미래의 전환점으로 바라본다. ‘Blank Black’에 담긴 텍스트는 ‘블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로 교차하는 이야기들을 파편적으로 제시하고, 이 와중에 자본주의와 내리막의 정서 또한 빼놓지 않고 건드린다. 이 모든 것을 단지 흑공이라는 지형적 대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다.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Neither Dark Nor Black》Installation view, Weekend-Seoul, 2020. Photo by Syeyoung Park


1 시공간의 오류에 갇힌 플레이어

<지지대>는 영상의 한 부분에서 운전 중에 포착한 도로의 모습과 로드뷰를 통해 본 도로의 모습을 중첩시켜 보여준다. 실재 장면과 로드뷰 장면은 각각 앞을 향해 직진한다. 두 장면을 비교해보면 둘은 같은 위치를 지나고 있지만 서로 다른 곳을 비추듯 이질적이다. 여기에 실재와 가상이라는 괴리의 틈을 타고, 거미가 몇 마리 등장한다. 거미는 실재 도로와 로드뷰로 본 도로 사이에 있다. 이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거미는 시리Siri가 되풀이하듯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거미는 시공간의 사각지대에 갇혔다.

     영상 작품 <흑공>의 게임 플레이어는 지도의 끝으로 가보고자 한다. 지도에서 하늘과 바다가 끝나는 가상 현실의 낭떠러지에 도착하면 캐릭터는 상어에게 먹히거나, 다리가 꺾인다. 잘 날던 비행기는 엔진 사고로 추락한다. 가상 세계는 스스로를 끝마치기 위해 캐릭터를 먼저 종결시키고, 캐릭터는 가상의 끝에서 죽음과 충돌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죽음은, 가상일지라도 그 안에 캐릭터가 갈 수 있는 곳과 결코 넘을 수 없는 곳이 분리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흑공>의 플레이어와 <지지대>의 거미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차원에 갇혀 있다.

    다른 한편, 차원을 넘어갈 수 있는 입구가 영상에 숨어있다. <지지대>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콜라이더가 체크되지 않은 땅은 지지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 땅은 3D 공간에서 자신에게 부딪히는 대상을 튕겨낼 수 없다. 물질은 땅을 부드럽게 스쳐서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콜라이더가 체크되지 않은 땅과 <흑공>에서 보여주는 조각상에 생긴 틈, 글리치가 만든 공백, 블랙홀, 보이저 1호가 진입한 태양권 계면은 다른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는 문이 된다. 시공간에 갇힌 플레이어와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열쇠가 영상 안에 공존한다.


2 희망을 버린 자 여기에 들어오라¹

흑공은 콜라이더가 체크되지 않은 땅처럼 겉에서는 땅으로 보이지만 밟는 순간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는 블랙홀 같은 지형적 특질이다. 전시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소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는 작품과 ‘흑공’이라는 가상의 배경을 공유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대학생 은지는 대출은 늘어가는데 앞으로의 취업은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아르바이트를 줄여야 공부를 해서 더 좋은 성적과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겠지만, 당장의 불안한 현실이라도 유지하려면 아르바이트를 줄일 수가 없다. 결국 그는 자신의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고시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던 와중 ‘흑공’의 존재가 알려졌고, 전 세계가 이것의 실체를 탐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어느 날 한 대기업에서 흑공에서 살아 돌아오는 사람에게 취업의 기회를 주고,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의 보상을 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앞선 사례들로 미루어보아 흑공에 들어간 사람들은 죽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은지는 이 공모에 신청했고, 결국 공모에 당첨되어 흑공에 들어가게 된다. 흑공 안으로 진입한 뒤 한참 후 정신을 차렸을 때, 어둠 속에서 날아다니는 저어새와 익숙한 문을 발견한다. 그 문은 그가 예전에 살던 고시원의 문과 똑같이 생겼다. 문을 열고 나간다면 떠나온 현실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살아남은 도전자로서 대기업에 근무하며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은지는 문을 열지 않았다.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무엇인가 기대했다가 이내 좌절하고 포기했을 것이다.


“살아야 한다는 게 은지가 있던 창 없는 고시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라면, 은지는 살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²


“그것은 어떤 만연한 분위기에 더 가까운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한다.”³


작품과 소설은 플레이어를 가둔 어떤 차원과 이곳을 벗어나게 해주는 통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은지에게 주어진 환경과 ‘Blank Black’의 구석에서 발견되는 텍스트는 흑공이라는 틈이 발견된 차원이 자본주의가 지배한 세계임을 암시한다. 은지가 흑공의 바닥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가지 않았던 이유는 자본주의가 지배한 삶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글리치 같은 오류의 틈에 숨고 싶었기 때문이다. 은지는 스스로 의식적 죽음에 갇히고자 했다. 결국 흑공에 들어온다는 것은 세계와 세계 사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위한 자발적이고 정확한 몸부림이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처음부터 희망을 버린 자가 여기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Neither Dark Nor Black》Installation view, Weekend-Seoul, 2020. Photo by Syeyoung Park


3 붉은 염증의 징후

흑공은 시스템의 오류가 만든 틈이면서, 동시에 끝없이 추락하도록 만들어진 시스템을 복제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소설 속 저어새의 멸종과 전시 서문에서 환기한 환경 위기, 추락의 가속화와 무기력의 근거가 된다. 대상화된 자연은 이 시스템의 폭력적 구조를 고스란히 대물림 받았고, 그 사이 지구 곳곳에는 염증이 붉어졌다. 기상이변이 나타났고, 점차 짧은 주기로 각기 다른 전염병이 발생되었으며, 미세먼지가 숨통을 조였다. 2020년 아프리카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억 마리의 메뚜기 떼는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 초래한 염증의 대표적 결과다. 소설에 등장하는 흑공에서 튀어나온 수천 마리의 저어새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흑공이 ‘블랙홀’이나 ‘화이트홀’처럼 시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라면, 거기서 튀어나온 저어새는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출발해 현재에 도착한 것이 아닐까. 착취하듯 자연을 다뤄온 결과로 머물 곳을 잃은 저어새가 흑공이라는 통로를 거쳐 새로운 생태계를 향해 날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수상쩍은 수천 마리 저어새의 등장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징후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환경 위기와 생태계의 문제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는 저어새의 멸종과 재등장처럼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결국은 불규칙하게 반복되며 생겨나는 흑공처럼 인간의 생태 역시 위협하리라는 것이다.


4 사건의 지평선

흑공은 현실에서 벗어나 차라리 갇히고 싶은 시공간의 오류이며, 자본주의 구조를 닮아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는 통로다. 하지만 이뿐만은 아니다. 이 경계는 세계와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지점이기도 하다. 흑공이라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⁴을 넘기 전까지 우리는 이 안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곳을 건널 수 있다면 거기에는 놀라운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를 건너려면 아무런 정보 없이 검은 늪을 향해 몸을 던져야만 한다.

     자본주의 구조보다 더 깊은 곳, 환경 위기와 생태계 파괴를 일으키는 사고방식의 토대에는 자연을 타자화하는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이 세계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첫 번째 내디뎌야 할 발걸음은 이곳을 단단하게 구축한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의 전환이며, 두 번째 발걸음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뛰어드는 실천적 움직임이다. 사건의 지평선을 향해 과감하게 날아가듯이,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의 경계를 넘어 새롭고 낯선 사고방식을 향해 몸을 던질 때 그리고 거기에 따른 행동이 이어질 때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작품과 소설은 흑공이라는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각자 다르게 끝을 마무리한다. 영상 작품은 “만약 여러분이 블랙홀 속에 있다고 느껴지면, 포기하지 마시길. 나갈 길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넌지시 희망을 건네는 듯하다. 반면에 소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로 한 체 의식적 죽음을 선택한 은지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 모든 것은 현 시스템의 문제에 대한 폭로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암시인가?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에 만족해야 하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점차 교묘하게 변형되는 자본주의 앞에서 무엇인가 희망하거나 폭로할 수 있기는 한가? 이 작품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건네려는 것인지 폭로를 터트리려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폭로로 그치게 하는 것도,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도 결국은 보는 이에게 달려있다. 언뜻 커다란 함정으로 보이는 이 구멍은 어쩌면 다른 의미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다.


반사하는 유리로 인해 그 내부를 볼 수 없는 전시장은 블랙홀과 닮았고, 흑공과 닮았다. 전시장의 문을 연 순간 당신은 더 이상 플라스틱 퇴적층이 쌓이는 지질 시대를, 자본주의 사회의 포기와 무기력을, 반어인지 진심인지 모를 미래의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다. 흑공은 여기에 들어온 당신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조건은, 흑공에서 살아 돌아오십시오.


《검지도 어둡지도 않은 Neither Dark Nor Black》Installation view, Weekend-Seoul, 2020. Photo by Syeyoung Park












1) 단테, 『신곡』 지옥편, 제3곡, 1~9행 (권정현 조주현 저, 『검고 어두운』, YPC PRESS, 2020, 85쪽과 전시의 서문에서 재인용),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라는 문장의 앞뒤를 바꿔 인용했다.

2) 권정현 조주현 저, 『검고 어두운』, YPC PRESS, 2020, 61쪽

3)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리시올, 2018, 36쪽 (권정현 조주현 저, 『검고 어두운』, YPC PRESS, 2020, 108쪽과 웹사이트 ‘Blank Black’, https://blankblack.xyz/ 에서 재인용)

4) 사건의 지평선 또는 사상의 지평선 또는 '이벤트호라이즌'이란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그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가장 흔한 예는 블랙홀의 바깥 경계 즉, 블랙홀 주위의 사상의 지평선이다. ["사건의 지평선", 『위키백과』 출판 연도 없음, https://ko.wikipedia.org/wiki/사건의_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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