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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리 Jan 08. 2021

젊은 꼰대와의 짧고 굵은 만남






안녕하세요, 저는 최유리 작가님의 브런치 애독자 K라고 합니다 :) "패션계에서 강요하는 트렌드에 따르기보다는 나를 입는 게 맞지" 라는 작가님의 글을 읽고 부터 훅! 맘이 끌려서 쭉 애독했답니다^^

저는 데이터 과학자 5인으로 구성된 X라는 팀의 리더를 맡고 있습니다. 저희는 데이터 과학을 활용해서 바쁜 일상 속에서 패션에 신경 쓰기 힘든 분들께 사이즈와 핏, 개인 취향에 꼭 맞는 상품을 큐레이션해서 보내드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

작가님과 한 번 만나 뵙고 얘기 나누고 싶습니다. 아래 제 네임 태그에 팀 소개 있으니 한번 봐주세요. 회신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K 드림.


몇 년 전.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왠지 진심보단 아부 같은 앞부분을 포함한 내용을 훑은 후 글쓴이가 보라는 네임 태그를 클릭하려던 순간, 글쓴이의 출신학교 이름을 발견했다. 업무용 메일 서명 란의 출신학교명이라. 커리어에서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의 허세로 보였다.


팀 소개 링크를 따라가 보았다. ‘머신 러닝이 우리 모두에게 쉽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것임을 믿는다’는 미국 명문대 출신 5명이 모인 팀. 거기엔 그들이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지,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가 없었다. 대신 거기엔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우리가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한국 시장을 단숨에 평정할 어벤저스야’


소개 글에는 팀원 한 명 한 명이 각각 미국 유학 시절 얼마나 우수한 성적으로 주목을 받았는지, 얼마나 높은 경쟁률을 뚫고 실리콘밸리 대기업들에 입사했었는지, 그것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얼마나 ‘간지 나는 도박’인지 장난스럽게 나열돼 있었다.


‘얘네 별로다’


그런 내 첫 느낌에도 난 그 메일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무렵의 내겐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리한 4가지 스타일링 법칙이 기술과 만나면 강력한 서비스가 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언젠가 그것을 구현해줄 개발자를 만나게 될 거라며.


욕심과 직감 사이에서 고민하던 끝에, 비즈니스 미팅 경험이 풍부한 절친 주희에게 조언을 구했다. 주희는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X사를 보았다. X사의 투자사가 어떤 회사인지 얘기해 주었다. 그런 회사가 투자한 스타트업이라면 괜찮은 곳이란 결론까지 내려서.


아닌 게 아니라 신문에서도 X사가 스타트업계의 큰 손인 모 기업으로부터 얼마를 유치했다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난 K가 어떤 됨됨이의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 벤처 기업에서 꽤 오래 일해 온 후배의 인맥을 빌어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후배의 지인 중에는 K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후배는 딱 한 마디만 남겼다.


“누나, 일 시작할 때 제발 계약서 쓰고 시작하세요!”


드디어 잡힌 첫 미팅의 자리. 난 주희에게 동석을 부탁했다. X사에선 팀원 A도 미팅에 참여했다. 미팅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외계어 같은 마케팅 용어들이 K와 주희 사이에서 핑퐁처럼 오갔다. 미팅에서 오간 얘길 모두 알아들을 자신이 없던 나는 녹음기를 켜놓고 미팅에 참석했다.


지켜만 보던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K가 내 스타일링 법칙을 어디가지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AI에 적용하여 구현할 것인지였다. 그러나 말이 적은 내가 끼어 들 틈은 없었다. 그 미팅은 내 미팅인데. 그때 동석한 X사 팀원 A가 조용히 눈을 빛내며 나를 살폈다. 내가 즐거운 그 둘의 대화와 A의 반가운 표정에서 안도하기 시작했을 때 K가 한 마디를 뱉었다.


“저희 목표는 한국의 스티치 픽스가 되는 거예요.”


스티치 픽스는 미국에서 패션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으로 당시 이미 성공한 회사였다. 그러나 만약 내 아이디어가 적중한다면 나는 스티치 픽스보다 나은 시스템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내 첫 직감은 까맣게 잊은 채, 욕심이 앞서 그만 들떠버렸다. 일주일이 지나고, 두 번째 미팅 자리에서 K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님, 저흰 미쿡 스타일이라 계약서 없이 일 안 해요.”

‘아하, 역시 믿을만 한 건가?’


나는 다시 안도했다. 결국 팀에 합류하는 것을 전제로 베타 서비스 중이었던 K사의 스타일링 업무에 참여했다. 밤을 새서 스타일링을 하고, 쇼핑몰에 사입을 나가고, 판매가 되지 않은 채 돌아온 상품은 직접 쇼핑백을 들고 반품을 다녔다. 매주 연재해야 했던 브런치 원고 마감과 겹칠 때면 체력이 한계에 달한 듯 힘겨웠다. 그렇게 영혼을 갈아 일을 한 지 몇 주가 흘렀다. 그러나 계약서 얘기는 없었다. 변호사의 법률 자문을 얻어 서류를 준비 중이라는 말만 들렸다. 재촉하는 건 내키지 않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그럴 때마다 후배의 말이 귓가에 울렸지만.


그런데 알고 보니 난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와 경쟁도 하고 있었다. 연예인 스타일리스트라는 경쟁자와 나. 둘 중 구매 전환율이 높은 스타일링을 한 사람이 X사와 정규직 계약을 맺고 수석 스타일리스트가 되는 거였다. 다행히 결과는 나의 압승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K는 계약서 얘길 다시 꺼냈다.


“작가님, 내일 저와 정식 계약서 쓰시죠.”


그러나 다음 날 출근을 해도 K는 계약서 얘길 꺼내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K는 미팅이 있다며 자릴 비웠다. 한편 그 즈음 내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있다. 개발자인 팀원들과 한 자리에서 일을 하며 엿본 P사의 시스템은 기대 이하로 허술했다. 그러자 조금씩 궁금해졌다. 내 첫 직감이 혹시나 맞았던 게 아닐까. 나의 궁금함이 불안함으로 돌아서려던 어느 날 밤, 나를 언니처럼 따르던 A에게 전화가 왔다.


“작가님, 너무 죄송해요. 저희 팀원 전원 오늘 긴급회의 했는데요, K같은 놈과는 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저희 모두 이 회사에서 손 떼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릎 꿇고 싹싹 빌 각오하고 왔다는 A와 나머지 팀원 L과 J. 셋은 우리 집 식탁에 앉아 그간 말할 수 없었던 풀스토리를 들려주었다. K가 화려한 언변으로 팀원들의 합류를 이끌어낸 후 겨우 풀칠할 정도의 보수를 제시한 계약서를 내밀었다는 얘기, K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왔을 뿐 본인이 머신러닝 시스템을 구축한 적은 없으며, 화려한 마케팅 용어로 사기 치는 연습에만 몰두했다는 얘기, 내가 정직원인 줄만 알았던 A도 몇 달이나 보수를 주지 않고 부려 먹었다는 얘기. K는 한 마디로 젊은 꼰대였다.


K는 내 아이디어를 도용하여 시스템을 구축한 후 무보수로 내칠 계획이었다. 나와 경쟁자였던 스타일리스트 분은 투자사의 추천으로 고용한 분이라 별다른 성과를 내지 않아도 투자사 눈치를 보느라 높은 보수를 제공했다. 그러나 성과가 월등했어도 프리랜서였던 나는 함부로 대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다. ‘미쿡 스타일’ 운운한 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K의 전략이었다. 그런 얘길 듣고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는 나의 차분함에 팀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사실 나 약간 눈치 채고 있었어요.”


진실을 알자, 한편으론 기뻤다. 처음에 품었던 나의 직감이 합리적 의심이었음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경험 부족을 핑계로 직감을 100% 믿지 못했다. 화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 희미한 직감 덕에 K를 100% 믿은 적은 없었으니까. 문득 그간의 모든 미팅을 녹음해 둔 것이 떠올랐다. ‘저흰 미쿡 스타일이라’ 이 얘긴 꼭 써먹어 주리라 결심하며. 그러나 그 순간부터 난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간의 웃음기를 걷어내고 당당히 내 몫을 받아 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지극히도 전투의지가 낮은 난 이런 싸움이 달갑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기로 했다.


한편 팀원들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제보로 K의 만행을 투자사가 알게 되었고, X사는 사업 철수를 피할 수 없었다. 며칠 후 K가 찾아 왔다. 비굴한 표정으로 미안함을 연기하는 그의 가식에 나도 가식적인 위로를 건넸다. 내가 그에게 웃는 낯을 보인 건 그가 내 보수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여 마지막 양심을 발휘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내 표정에서 화를 발견하지 못한 K는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제안을 시작했다. 투자금 회수라는 상황으로 보수를 모두 주기 어려우니, 내 보수 중 일부를 금전적인 보상 대신 자신이 내게 코딩을 가르쳐주는 재능 기부 형식으로 대신하면 안 되겠냐는 것이다. 확실히 그는 양심이 없는 놈이다.


다음 날, K로부터 장문의 메일이 왔다. 내용은 이랬다. 나와 함께 일한 건 단지 합을 맞춘 것 이상의 의미가 없으며, 정규직 전환 얘긴 한 번도 오간 적이 없었다는 것, 내가 요구한 보수를 모두 지불하기에는 스타트업 업계가 원래 열악하며, 회사가 그렇게 된 형국이니 더더욱 보수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임계치는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화를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대신 몇 가지 서늘한 사실을 포함한 메일을 보냈다. 첫째, 정규직 전환 얘기가 언제부터 나왔는지는 카톡방 대화 내용으로 충분히 입증 가능하다는 것, 둘째, 회사 상황 악화에 나는 어떠한 책임도 없으며 회사 상황이 악화된다고 해서 내가 일한 노동의 가치가 감소되지는 않는다는 것, 셋째, 처음부터 ‘미쿡 스타일이라’ 계약서 얘길 꺼냈다는 사실은 0월 0일 미팅에서 나온 얘기였다는 것. 그날의 미팅 내용은 녹음해 두었으니 파일이 필요하면 친절히 보내주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K는 내 메일에 한 글자도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팀원들의 말에 의하면 K는 예상 밖의 내 태도에 놀라, 내가 과도한 요구를 했다고 투자사에 고자질을 했다. 물론 투자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보다 못한 투자사가 나와 합의를 하게 됐다. 결국 내가 받은 금액은 내가 정규직으로 채용 시 기대했던 보수의 125%였다. 처음부터 계약서를 썼다면, 적은 돈을 써도 됐을 텐데 말이다.


내향적인 내가 받는 오해 중 하나는 내가 어떤 공격도 할 줄 모르는 바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K는 동물의 왕국에서 사자 쯤 되는 놈이다. 포효하지 않는 조용한 인간을 보고 자기가 더 강하다고 착각하는 단순한 놈. 아니, 따져보면 사자도 못 된다. 투자사 앞세워 호랑이 행세나 하는 여우일 뿐.



나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조직의 등에 올라 탄 사람들은 프리랜서를 함부로 대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무례함은 그에 동의하지 않으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마법을 부린다. 프리랜서가 조용한 사람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명함에서 회사 이름 지우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그 앞에서 화가 날수록 나는 화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화를 내는 순간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세요?”라는 말이 돌아오고 갈등의 본질이 흐려지니까.


‘화나다’와 ‘화내다’는 다르다. ‘화나다’는 인지이고, ‘화내다’는 표현이다. ‘화내다’가 표현임을 아는 순간부터 ‘화내다’는 수위 조절이 가능한 것이 된다. 나는 K와의 분쟁에서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 갈등의 본질을 일깨울 결정적인 사실만 제시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 요구가 관철되었다. 상대가 나의 평정심에 놀라는 건 덤. K는 내 메일을 받은 이후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못했다. 엄두를 못 낸 게 아닐까.


그 해 가을 내가 겪었던 한 바탕의 소동은 몇 가지를 남겼다. 계약서 앞에선 칼바람 쌩쌩 불 정도로 냉정할 것. 겉으로 화려하지 않아도 내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과 손을 잡을 것. 욕심에 눈 멀지 않을 것. 내 직감을 끝까지 믿을 것. 내겐 예민함으로 장전된 총이 있음을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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