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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Oct 09. 2022

영화 감상에도 훈련이 필요할까?

영화에 나름 관심 좀 있다고 착각했던 적이 있다. 스무 살이 되고 대학에 처음 와서 영화 강의를 들었을 때였다. 영화들은 모두 고전이었고 나는 질 나쁜 화질에 형편 없는 자막, 발전이 덜 된 영화 기술만을 보고 학을 뗐다. 그때 본 영화들을 나열해 보면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 등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지만 그때의 나는 이 영화들과 교감을 나누기 꺼려했다.

<독일 영년>에서 아이가 건물 위층에서부터 떨어지는 장면의 조잡한 편집을 보고는 요즘 영화의 우월함에 대해 생각했고, <자전거 도둑>이 어떤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몰라 영화 후반부의 가슴 저린 씬을 보고도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였다. <동경 이야기>는 이 영화 제작을 허락해준 제작사의 경제적 지위가 궁금했다. 얼마나 돈이 남아돌면 저런 영화를 만들까?

  물론 이때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곰곰히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관객의 참여를 적극 바라고 원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나 스스로를 영화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똥파리>, <퍼니 게임>, 이창동 감독의 <시>, <밀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킬링 디어> 등을 보면서 이 영화들 보다 대단한 영화가 있겠냐는 오만함에 빠져서 고전 영화를 멸시하다시피 했다. 그때의 나는 영화에서 주는 호소력에 감응하는 대신 미장센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상징을 찾는데 온 힘을 썼다. 이창동의 영화들은 머리로만 이해하고 친구들 앞에선 좋다고 떠벌렸다. 영화를 예술 작품이 아닌 한 단계씩 풀어나가야 할 수수께끼처럼 상대했던 것이다.  


영화 <만춘>. 출처 criterion collection


영화를 보면서 머리는 움직이지만 마음이 움직였던 적은 없었다. 예술과 철학이 뒤섞인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도 나는 그 안에서 관념만 찾으려 했지 영화의 이미지 자체에는 무관심했다. 이런 나의 감상법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영화가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1949) 이다.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와 그에게 순응할 생각이 없는 딸의 이야기. 스토리라인만 보면 흔한 가족 간에 펼쳐질 신경전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장르적인 쾌감이나 자극 없이 그들간의 감정 변화와 관계를 차분하게 펼쳐나간다.

  이때의 내가 뭐에 씌여서 <만춘>을 넋놓고 봤는지 기억 안 난다. 영화 후반부에 보여주는 꽃병 쇼트에서 왜 내 마음은 움직였을까. 저 정물(靜物) 하나에 목석 같던 감수성이 어떻게 햇빛 아래 얼음마냥 녹아버렸을까. 움직이지 않는 꽃병 하나가 나에게 가져다 준 커다란 감동은 1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때부터였을까.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영화들을 만나기 시작했던 때가. 영화를 보는 자세를 고쳐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가.


<욕망>, <선셋 대로>를 시작으로 부뉴엘의 <절멸의 천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닥치는 대로 고전 영화를 보았다. 영화라는 예술 매체를 향한 애정을 다른 방식으로 쏟아냈다. 저 장면의 의미와 상징, 정신분석학적 개념 따위는 저리 치웠다. 대신 (첫 감상 때 만큼은) 어떤 장면에도 질문하지 않고, 그냥 봤다. 신도 카네토의 <벌거벗은 섬>부터 시작해 다시 본 <동경 이야기>, 데이비드 린의 멜로 걸작 <밀회> 역시도 영화적 연출, 정신분석학적 개념은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보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예전에 봤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킬링 디어> 같은 생각하면서 본 영화들도 그 전과는 다른 자세로 보았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지속했다. 

  절정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노스탤지아>였다. 감독 본인은 영화에 들어가는 장면에 상징을 부여하기 싫어했지만, 그를 처음 접했던 나는 그런 상징 해석의 유혹에 굴복하고 싶었다. 1+1= 1은 뭘까? 저기서 왜 동물이 등장할까? 왜 남자 주인공이 저곳으로 들어갈까? 이런 질문의 유혹에서 나는 가까스로 벗어났다. 어떻게 벗어냤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한 작품에 빨려들어가는 체험에는 어떤 공식의 도움도 필요 없고,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그냥 마음을 놓는다. 포기하면 편하다. 해석하지 말자. 영화 중간부터는 어떤 사념 없이 <노스탤지아>에 빠져서 봤다. 그 유명한 촛불 시퀀스에서 나는 결국 전율하고 말았다. 지금도 <노스탤지아>는 타르코프스키 영화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욕망을 욕망하는 것을 잊으라는 누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예술 작품을 '잘'감상하겠다는 욕망의 망각이 중요하다. 나와 영화는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남녀가 아니다.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은 영화를 볼 때 만큼은 무용지물이다. 내 머리만 피곤해진다. 감상의 욕구도 바닥이 난다. 그냥 저 영화가 보고 싶다는 욕구가 중요하다. 일단 틀고 본다. 생각하지 말자. 그 생각마저도 영화를 볼 때 만큼은 잡념에 불과하다.

  두 번째 감상부터는 생각하면서 본다. 결말을 알기 때문에, 감독은 어떤 생각으로 저기까지 도달했는가 유심히 분석한다. 분석의 시작은 재감상부터다. 하지만 첫 감상 때만큼은 머리와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잘'보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 두 시간 동안 진득하게 무언가를 감상하는 일에는 이러한 훈련이 필요하다. 욕망의 망각. 문득 어려운 장면이 나왔어도 그걸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일단 받아들이는 훈련. 이 훈련의 이점은 영화 관람 도중이 아닌 관람 이후에 나온다. 극장을 나오면서 문득 떠오르는 영화의 어떤 쇼트. 이해는 못 했지만 대신 가슴으로 받아들인 그 쇼트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머릿속에서 그 영화가 다시 한 번 상영된다. 또 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른다. 다시 봐라. 재감상으로 그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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