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억 속에 숨겨진 옛이야기를 찾아서

by 김영연

엄마는 몇 날 며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다. 시리즈가 몇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너무 많이들어서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엄마, 왜 또 그 이야기를 해요?” 하고 묻던 우리가 이제는 처음 듣는 것처럼 놀라며 맞장구를 쳐준다. 그만큼 치매를 앓는 엄마의 세계에 우리가 적응해 가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가족은 모내기 이야기를 쉰 번은 넘게 들었을 것이다. 엄마는 모내기 이야기를 할 때면 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모내기 할 때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빨랐지.” 그러면서 왼손에 모를 한 움큼 쥔 듯 허공을 잡고, 조금씩 뜯어내 심는 동작까지 그대로 재현해 보이셨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면 모심기 철이라 그런지 비가 많이 온다고 하면서 그 시절 온 관심이 모내기철에 맞추어져 있었다. 아버지를 모내기를 도우러 가야 한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가을이 되어 추수할 즈음에도 엄마는 여전히 모내기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모내기때 일을 잘하니 불려 다닐 정도였고, 품삯도 다른 사람들 몰래 더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는 계절도, 시간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고구마 캐던 시절 이야기도 실감나게 들려주셨다. “고구마 덤불을 후루룩 걷어내면, 고구마가 주렁주렁 달려 올라왔지.” 남은 것들은 호미로 일일이 파냈다며 손짓까지 하는데, 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엄마는 홀치기 이야기도 했다. 농번기가 지나 겨울이 오면, 엄마들은 모여 앉아 홀치기 작업을 했다. 작은 점무늬가 박힌 천을 염색하기 위해, 천의 한 부분을 작은 고리에 걸어 손으로 훑어내리며 매듭을 묶는 방식이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 누군가 손으로 만든 도구였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말이 기계이지, 사실 홀치기 기계는 기계라고 할 것도 없이 고리와 막대가 전부였다. 점들이 아주 작았기 때문에, 고리에 천을 걸어 점 부분을 정확히 잡아 묶어야 했다. 십여 년 전 골동품 시장에서 어설퍼 보이는 홀치기 기계 하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 사서 집에 가져왔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천들은 아마도 일본의 기모노나 유카타에 들어가는 원단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노동력이 싸던 시절, 농촌에서 겨울철에는 할 일이 없으니 홀치기 작업으로 작은 돈벌이를 하며 생계를 보탰던 셈이다. 엄마가 일하던 모습이 재밌어 보여 나도 홀치기 기계 앞에 앉아 흉내를 내보려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그 손놀림이 남들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해도 더 많이, 더 빠르게 해서 돈을 조금 더 벌었다고 했다.


엄마는 정식 학교인 국민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다니던 그때, 선생님이 엄마를 잘 챙겨 주시고 예뻐해 주셨다고 했다. 선생님의 이름까지 아직도 기억할 정도였다. 동네에서 하는 야학에도 엄마는 열심히 다녔다. 국민학교든 야학이든, 엄마는 늘 1등을 해야 했고, 백점을 맞아야 했다. 그래서 밤잠을 거의 줄여가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린 마음에도, 성실함과 책임감이 자리 잡았던 순간들이었나 보다.


어느 날 집에 볼일이 있어 큰이모와 함께 외가에 갔더니, 인민군들이 그 집을 점령해 사용하고 있었다고 했다. 한창 꽃다운 처녀들이었지만 다행히 헤코지는 당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덧붙였다.

“그 사람들 마음이 아주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어.” 외가에는 소가 세 마리나 있었고, 개도 몇 마리 있었다고 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때였지만, 인민군들이 소는 끝내 잡아먹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인민군이 개를 잡아먹으려고 총을 쐈고, 한 발이 한쪽 다리에 맞아 개는 절뚝이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개는 세 개의 발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인민군이

“세 발로도 잘 달려 갔어.”

라고 말했다는데, 그 말이 엄마의 귀에는 “씨발로”라는 욕처럼 들렸다고 했다. 엄마는 그 기억을 그렇게 비틀어 풀어내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웃음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웃음으로 감당해야 했던 기억의 무게였다.


또 한 번은 감천강을 건너 배를 타고 다시 피난을 가야 했다고 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이모들과 먼저 가라고 했지만, 엄마는 부모님과 함께 가야 한다며 끝까지 떼를 썼다고 했다. 나중에 엄마는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이모들을 따라갔더라면, 자신은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라고. 실제로 그 피난길에서 두 이모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할아버지의 친구 집으로 모두 피난을 갔다고 했다. 폭격 소리가 너무 무서워 엄마는 대청마루 아래에 몸을 숨겼다가, 잠시 고개를 내밀어 할아버지와 어른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서야 겨우 안심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옥주 이모가 사라져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고 했다. 그 이모를 찾아낸 사람이 엄마였다. 엄마는 가장 아끼던 동생을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저곳을 헤매며 다녔다고 했다.


방천둑 위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절뚝이며 걷고 있는 이모를 발견했다고 했다. 포탄이 이모의 허벅지를 관통해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와 이모는 쌍둥이처럼 같은 검정 비로도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가 검은색이라 처음에는 피가 젖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했다. 얼굴은 머리카락에 뒤엉키고 검게 변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엄마는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차렸고, 곧장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 순간, 엄마는 가족의 생사를 가르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는 변변한 약도 없어서 상처에는 된장을 발랐고, 여름이라 구더기가 들끓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모를 궤짝에 넣어 지게에 지고, 피난길 내내 끝까지 데리고 다녔다. 주변에서는

“멀쩡한 자식도 버리는 판에, 그 아이를 왜 그렇게까지 데리고 다니느냐” 고 말렸지만, 할아버지는 끝내 이모를 놓지 않았다. 옥주 이모는 그 시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시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계신 듯했다.


엄마의 6·25 피난 이야기는 처절했다. 피난은 한 번이 아니었다. 모두가 몇 차례씩 떠돌았다고 했다. 옥주이모도 크게 다쳤고, 엄마의 이모 중 두 분도 돌아가셔서 더 이상 멀리는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리 멀지 않은 연흥이모댁으로 피난을 갔다고 했다. 그곳은 깊은 산골짜기 아래에 있어서 그나마 눈에 그의 띄지 않았기에 그곳으로 대식구가 몸을 숨겼다고 했다. 그 집 역시 가족이 많았을 터였고, 먹을 것이 넉넉할 리 없었다. 이모부가 눈치를 주었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그 집에는 방공호처럼 생긴 지하 공간이 있었고, 폭격 소리가 들리면 미끄러지듯 그곳으로 모두 내려가 숨을 죽였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낸 피난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때의 가난과 불안은 아직도 엄마의 몸에 남아 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아끼고, 어디를 가더라도 미리 준비한다. 지금도 가끔은 연흥이모집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자주 가곤 했었던 곳이 그 이모댁이 아니었을까라는 짐작이 들기는 했다.


엄마가 교회에 다니던 길에 인민군에게 붙들릴 뻔한 이야기는, 아마도 엄마 기억 속에서 가장 깊이 새겨진 사건일 것이다. 교회에 오가던 길에는 참나무 밭이 있었다. 숲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늘 서둘러 달려 지나가곤 했다고 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돌아오던 엄마는 그 참나무 밭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산에서 인민군 한 명이 내려와, 엄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끌고 가려 했다고 한다. 파출소가 어디에 있는지 등, 동네 사정을 자세히 물었다고 했다.

“동무, 어디에 가우?” 말투에서 인민군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순간 엄마는 재빨리 저만치서 걸어오는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회 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저기 오는 사람이 우리 오빠예요. 오빠가 나를 마중 나오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인민군은 잠시 멈칫하더니 엄마를 놓아주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북으로 가지 못하고 산 속에 숨어 있던 병사였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가까스로 풀려나 동네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렸고, 청년들이 그를 찾으러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쌍전봇대 아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하지만, 혹시 더 험한 일을 벌일까 싶어 그냥 조용히 놓아두고 내려왔다고 했다.


엄마는 이 일을 무용담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즐겨 이야기하곤 했다. 그 순간의 공포, 그리고 살고자 했던 기지가 아직도 엄마 마음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순간의 공포와 긴장은, 어린 엄마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주곤 하셨다.


또 따라가 보자, 엄마의 오래전 기억의 섬으로,

감천가의 외갓집, 어린 시절의 교회를 오갔던 길…

엄마의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섬처럼 흩어져 있다.

나는 그 섬들을 찾아 나선 항해자다.

엄마의 과거의 기억을 발견해 드리고, 현재를 얹어드리는 일을 조금씩 더해 가야겠다. 교회만은 꼭 가셔야 했던 처녀 시절의 엄마, 전쟁 속에서도 동생을 찾아 다녔던 어린 시절의 엄마, 온갖 삶의 고단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엄마…. 그 기억 위에 오늘의 햇살을 살짝 얹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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